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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원 대천간 철도부설인가 신청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372
한자 鳥致院大川間鐵道敷設認可申請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상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6년 02월 06일 - 경남철도주식회사에서 조치원~대천 간 철도설치인가 신청서 제출
발단 시기/일시 1898년 9월 8일연표보기 - 한·일 양국의 공동경영을 전제로 한 경부철도합동조약을 체결
전개 시기/일시 1901년연표보기 - 경부철도주식회사 8월 21일 북단인 영등포와 9월 21일 남단인 초량에서 각각 기공식을 갖고 착공
성격 사건·사고와 사회운동

[정의]

1926년 충청남도 지역을 대상으로 진행된 조치원~대천 간 철도 부설인가 신청.

[개설]

조선 후기의 조치원은 전형적인 한국농촌의 모습으로 연기현과 청주 경계 지역이었다.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고 그 유용성이 인식되면서부터 작은 장시에 지나지 않던 조치원에 역동적 변화가 시작되었다.

1926년 2월 6일 경남철도주식회사(慶南鐵道株式會社)에서 조치원(鳥致院)~대천(大川) 간 철도설치인가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조치원을 기점으로 하여 공주·부여·청양·대천까지 철도를 부설하고, 대천에 항구를 건설할 목적으로 노선이 설정되었다.

경부선 부설 당시 노선이 전의군, 연기군을 통과하게 되자 두 지역의 많은 일꾼이 경부철도부설공사에 반강제적으로 동원되어 노역하였다. 당시의 반감이 부설 신청을 둘러싸고 또다시 찬반양론으로 이어져 지역 민심을 동요시켰다.

[역사적 배경]

경인철도 부설권이 미국인 제임스 모스에게, 경의철도 부설권이 프랑스인 그리예에게 차례로 넘어가자 일본은 본국 정부의 후원 아래 총력을 기울여 경부철도주식회사(京釜鐵道株式會社) 창립을 추진하였다. 백방으로 한국 정부와 교섭하여 1898년 9월 8일 한·일 양국의 공동경영을 전제로 한 경부철도합동조약을 체결하여 숙원을 달성하였다.

1920년대 세계의 자본주의는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접어들었으며,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제국주의(帝國主義)의 강제 수탈을 ‘○○회사’라는 이름으로 대행하는 시기였다. 이권 쟁탈을 위한 일본의 침략 행위도 우리나라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한 철도주식회사를 통해 크게 자행되었다.

국권침탈 전 한반도에서는 철도 가설권, 해관(海關) 관리권, 전기 사업권, 포경 어로권 등 각종 이권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열강이 경쟁하였다. 이번에는 타 지방의 경남철도주식회사가 연기군 지역에서 이권을 행사하는 격이었다. 경남철도주식회사의 조치원~대천 간 철도설치인가 신청으로 인하여 경부선 부설 때와 마찬가지로 찬반 양론이 대립하며 지역의 민심이 둘로 나뉘었다.

[경과]

경부철도주식회사는 1901년 8월 21일 북단인 영등포와 9월 21일 남단인 초량(草梁)에서 각각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착수하였다. 충청 지역 철도 공사는 조치원읍에 건설사무소를 두고 추진하였다. 조치원 건설사무소는 지역 경제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전의현연기현 두 지역의 중심지가 경부선 중점 역이 설치되는 조치원읍으로 옮겨지고, 조치원이 교통 중심지로 근대적인 도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당시 화차 급수기지로 조치원이 적합지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공사는 속성공사로 착수되었으며, 남부 성현~영등포 간 77리 32쇄(심천정거장 남단) 지점에서 남북 궤도가 연결되어 경부철도 속성공사가 준공되게 되었다. 경부선 공사 완공으로 조치원은 충청권 최고의 상업도시가 되었다.

뒤이은 조치원~대천 간 철도부설인가 신청 후에 조치원 민심은 다시 요동쳤다. 터널, 교량 등 공사가 속도전 양상으로 진행된 경부선 공사 당시 노동력의 수탈이 극심한 데서 오는 후유증을 비롯해 토지의 자산가치 증대로 이익을 본 지주 간 의견 대립 등이 있었다. 한편으로 조치원 주민에게는 숨은 희망이 있었다. 대를 이어 전해지는 이야기에 ‘신라 최치원 선생이 이 지방에 시장을 개설하고 권농하기 위해 제방을 축조하여 준 감사의 표시로 공을 영세토록 불망(不忘)하려고 기념비를 건립한 것이 홍수에 매몰되었는데 그 석비가 어느 때든지 다시 노출되면 조치원은 대발전 된다’는 미지의 전설을 믿고 있었다.

따라서 조치원 주민들은 충북선 부설공사와 조치원제방 개수공사, 시가확장공사, 미호천제방 신축공사 등 토목공사의 대소를 막론하고 땅만 파내면 혹시나 선생의 기념비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과 기대로 요동쳤다.

[결과]

충청남도 도청이전운동이나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의 합도(合道)설도 토지와 건물 가격만 폭등시킨 뒤 풍설에 그쳤으며, 조치원~대천 간 철도 부설건도 유야무야되었다.

[의의와 평가]

최근 세종 지역은 경부선을 비롯한 고속철도 오송역을 매개로 철도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고, 세종~보령 간 철도가 계획되어 있다. 조선 시대 때부터 금강의 수운을 통한 해상과 육상교통의 요지로 한양에서 호남·영남으로 통하는 중심지 역할을 담당해 오던 세종특별자치시가 행정·철도교통 중심지로 더욱 발전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열강들이 한반도에서 각종 이권을 획득하는 제국주의 이권 쟁탈의 침략적 행위가 철도 부설 공사였지만 지역에서는 발전에 대한 열망과 강제수탈에 대한 거부 양론으로 충돌하였다. 조치원~대천 간 노선은 일제가 침략 수탈 정책을 뒷받침하는 심줄이었고, 충북선과 함께 내륙자원의 반출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목적에 의하여 부설되려던 것이었다.

한반도를 동서로 관통하는 조치원~대천 간 철도부설인가 신청은 충청 지역 곳곳의 간선 및 지선 철도 형태가 주요 산업 단지와 지하자원을 연결하려 한 일제의 침략정책 수행의 핵심 내용이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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