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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서원 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431
한자 鳳巖書院-
영어공식명칭 Bongamseowon Site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봉암리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고수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51년(효종 2) - 봉암서원 설립
훼철|철거 시기/일시 1864년(고종 1)연표보기 - 봉암서원 훼철
성격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봉암리에 있는 조선시대 설립된 봉암서원의 터.

[개설]

봉암서원(鳳巖書院)은 1651년(효종 2)에 건립되어 1665년(효종 6) 연기현에서는 유일하게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제향 인물은 한충(韓忠), 김장생(金長生), 송준길(宋浚吉), 송시열(宋時烈) 등이었다.

봉암서원은 다른 서원 사우들과 마찬가지로 1864년 대원군의 훼철령으로 훼철되어 재건되지 못하였다.

현재 봉암서원 유지(遺址)[예전에 건물 따위가 있었거나 사건이 일어나 역사적 자취가 남아 있는 자리]에는 1757년(영조 33)에 건립된 「봉암서원사적비(鳳巖書院事蹟碑)」만 남아 있다.

[위치]

봉암서원 터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봉암리 안봉암 마을의 동쪽 끝에 위치하여 있다.

[변천]

봉암서원은 『서원가고(書院可攷)』, 『연기지』 등에 1651년(효종 2)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연기유생 민후건(閔後騫)이 쓴 「봉암서원청액소(鳳巖書院請額疏)」에는 1645년(인조 23) 반계(磻溪)에 처음 건립하여 한충(韓忠)[1486~1521]을 독향(獨享)[사당이나 서원에서 한 사람만의 신주를 모셔 두고 제향하는 일]한 향현사(鄕賢祠)[지방 현사(賢士)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었다고도 한다.

그러다가 1651년에 향유(鄕儒)[시골에 사는 유생]들과 합의하여 서원으로 건립하였고, 이후 11년 만인 1662년(현종 3)에 호서 사림계의 종장이라 할 수 있는 사계 김장생을 병향(幷享)[사당에 신주(神主)들을 같은 줄에 나란히 두어 함께 제사함]하여 서인 노론계 인사들이 관여하게 되었다.

3년 뒤인 1665년(현종 6)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반암(磻岩)’이라는 액호를 하사받게 된다.

그런데 반암서원은 곧바로 석담으로 이건(移建)[건축물 등을 옮겨 짓거나 세움]되고, 다시 현재 위치인 봉암으로 재이건되면서 서원 명칭도 ‘봉암서원’으로 바뀌었다.

사액 명칭이 변동되는 사례는 특이한 예로, 이와 같이 이건되고 운영된 것은 동춘당 송준길 및 우암 송시열과 깊은 관련이 있다.

봉암으로 위치를 옮긴 후인 1685년과 1721년에 송준길과 송시열을 차례로 추향하였으며, 이 시기부터 서인-노론계가 서원 운영에 적극 참여하여 봉암서원은 명실상부한 서인-노론계의 서원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757년(영조 33)에는 「봉암서원사적비」가 세워졌다. 「봉암서원사적비」는 서인 노론계의 파평인 윤봉구(尹鳳九)가 찬하고 송시열의 후손 송환성(宋煥星)이 썼으며, 한산인 이규항(李奎恒)이 전서를 썼다.

[현황]

1824년(순조 24) 간행된 『연기읍지(燕岐邑誌)』에는 봉암서원의 운영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동재에 장의 1인과 유사 2인, 서재에 장의 1인과 원생 30명 및 모입원생 30명을 두었다고 한다.

봉암서원 관련 고문서 자료로는 연기향교에 전하는 『원장안(院長案)』, 『서원별청안(書院別廳案)』, 『경유사안(京有司案)』, 『예겸도유사안(例兼都有司案)』, 『심원록(尋院錄)』, 『원생안(院生案)』 등이 있다.

한편 봉암서원은 1868년에 훼철된 후 재건되지 못하고 서원의 옛 터에 1757년(영조 33) 세워진 「봉암서원사적비」만이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봉암서원은 조선 후기 연기현을 대표하는 유일한 사액서원으로, 한충을 비롯하여 김장생·송준길·송시열을 제향한 서원이었다.

대원군의 서원 훼철 이후 터만 남았고 복설되지 못하였지만 1757년에 건립된 「봉암서원사적비」가 옛터에 남아 있고, 서원과 관련된 다양한 고문서 자료가 남아 전하여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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