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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511
한자 江華崔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임선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510년(중종 5) - 최완 출생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570년(선조 3) - 최완 사망
본관 강화최씨 - 인천광역시 강화군
세거|집성지 강화최씨 세거지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최완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리 중뜸마을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효자 최회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최회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열녀 전주이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조치원 봉산영당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연기 봉산 향나무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강화최문건기제현비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리 지도보기
성씨 시조 최익후
입향 시조 최완

[정의]

최익후를 시조로 하고 최완을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세종특별자치시의 강화최씨는 제정공파의 최완이 16세기 중엽에 처향인 연기현으로 입향하면서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주로 조치원읍 봉산리에 세거하였으며 입향조의 묘소와 후손들의 효열 정려 등 관련 유적이 남아 있다.

[연원]

강화최씨의 시조는 고려시대의 문신 최익후(崔益厚)이다. 최익후는 문과 출신으로 사복시(司僕寺) 소경을 지냈으며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 벼슬을 지냈다고도 한다. 최익후 후손들이 강화(江華)에 터를 잡고 살아 본관(本貫)[시조(始祖)가 난 곳]이 되었으며 봉산리 강화최씨는 제정공파이다.

제정공(齊貞公) 최용소(崔龍蘇)[?~1422]는 최익후의 9세손으로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많은 정치활동과 대일 외교활동을 하였으며 공조판서와 판한성부사에까지 이르렀다. 제정(齊貞)이라는 시호(諡號)[제왕이나 재상,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를 받았다.

[입향 경위]

강화최씨 봉산리 입향조는 시조 최익후의 15세손이며 제정공 최용소의 7세손인 최완(崔浣)[1510~1570]이다. 최완은 1534년(중종 29)에 서울[京]에 거주하면서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첫 번째 부인은 이씨이나 후손이 없고 두 번째 부인은 풍양조씨 주부(主簿) 조당(趙瑭)의 딸이다. 서울의 의동(義洞)[현 서울특별시 종로5가 효재동]에 세거하던 최완이 말년에 연기로 낙향하여 자손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아마 두 번째 부인인 풍양조씨와 혼인한 인연으로 연기에 정착한 것으로 여겨진다.

[현황]

문중에 전해 오는 2책의 사마방목에 수록된 명단 가운데 1705년(숙종 31)에 입격한 최훤(崔烜)[1674~?]과 1719년(숙종 45)에 입격한 최시(崔是)[1701~?]의 거주지는 모두 연기로 기재되어 있다. 조치원읍 봉산리에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관련 유적]

조치원읍 봉산리에는 강화최씨 입향조인 최완의 묘소, 효자 최회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와 묘소, 열녀 전주이씨 정려 등이 있다. 효자 최회 정려는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호로 지정되어 있고 열녀 전주이씨 정려는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강화최씨의 ‘8대 15효열’을 기리기 위한 강화최문건기제현비(江華崔門建紀諸賢碑), 조치원 봉산영당, 연기 봉산동 향나무 등도 조치원읍 봉산리에 있다. 조치원 봉산영당은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되어 있고 연기 봉산동 향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21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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