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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528
한자 寶城吳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윤윤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575년(선조 8) - 오유립 출생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582년(선조 15) - 오상건 출생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658년(효종 9) - 오유립 사망
입향 시기/일시 1500년대 후반 - 오유립 입향 추정
입향 시기/일시 1500년대 후반 - 오상건 입향 추정
입향 시기/일시 1500년대 후반 - 오숙노 입향 추정
본관 보성오씨 본관 - 전라남도 보성군
입향지 보성오씨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노호리 지도보기|부강면 금호리지도보기|전동면 심중리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보성오씨 집성지 -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노호리 지도보기|부강면 금호리지도보기|전동면 심중리지도보기
묘소|세장지 보성오씨 노호리 묘역 -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노호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열녀 진주정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노호리 71 지도보기
성씨 시조 오현필
입향 시조 오유립|오상건|오숙노

[정의]

오현필을 시조로 하고 오유립, 오상건, 오숙노를 각각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오현필(吳賢弼)[1175~?]을 시조로 하는 보성오씨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금호리·노호리전동면 심중리에 정착하였고, 지금까지 부강 지역에서 600년 동안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는 대표 성씨이다.

[연원]

보성오씨의 시조 오현필은 고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해 화순의 수령을 지냈다. 고종 때 거란군을 격퇴한 공으로 보성군(寶城君)에 책봉되어 보성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후손 진의부위(進義副尉)를 지낸 9세 오숙동(吳叔仝)은 조선 태종 때 왜구가 빈번하게 침입하자 왜구를 피하여 보성을 떠나 지금의 청원군 현도면에 정착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인근 지역에 흩어져 살며 여러 분파를 이루었다.

[입향 경위]

부강면 금호리노호리보성오씨는 삼기문중(三岐門中)을 형성한 10세 오인후(吳仁厚)[1426~1507]의 후손이다. 오인후의 손자 12세손 오천령(吳千齡)[1483~1532]의 후손은 노호리, 오억령(吳億齡)[1486~?]의 후손은 금호리에 각각 세거하며 터전을 잡았다.

부강면 노호리 보성오씨는 15세손 오유립(吳裕立)[1575~1658]을 입향조로 하여 월송정(月松亭) 진사공파를 형성하였다. 오유립은 학식과 문장이 탁월하였지만 광해군 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월송정을 짓고 노봉서원(魯峰書院)을 세웠다.

부강면 금호리 보성오씨는 16세손 오상건(吳尙乾)[1582~?]이 팔봉에서 살다 금호리 검시마을로 옮겨 와 경주이씨와 혼인하고 처가가 있는 금호리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검시마을은 주로 경주이씨창녕성씨가 살고 있었으나 점차 보성오씨가 집성촌을 이루었다.

또한 보성오씨전동면 심중리에도 정착하였다. 1500년대 후반 오숙노(吳淑老)가 입향하여 보성오씨 판관공파를 형성한 것으로 추측된다.

[현황]

부강면 노호리에는 보성오씨가 광복 이전 대략 96가구가 살았으며 2015년에는 33가구가 거주하였다. 부강면 금호리에는 1950년쯤 대략 56가구가 거주하였으며, 2015년에는 25가구가 거주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연기군보성오씨는 305가구 944명이다. 부강 지역이 세종특별자치시에 편입되어 2015년 세종특별자치시 보성오씨는 1,553명으로 남자 765명, 여자 758명이다.

[관련 유적]

1884년(고종 21) 부강면 노호리 마을 입구에 세운 인봉비(印峰碑), 오씨세거 노호동천(吳氏世居盧湖洞天)과 보성오씨천(寶城吳氏阡) 등의 비석이 있다.

1934년 보성오씨 오상정(吳尙井)[1614~1651]의 부인 진주정씨를 기리기 위하여 후손 오희진(吳熙瑨)이 열녀 진주정씨 정려를 세웠다. 열녀 진주정씨 정려는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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