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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568
한자 昌寧成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임선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443년(세종 25) - 성중의 출생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724년(경종 4) - 성한취 출생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464년(세조 10) - 성희 사망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776년(영조 52) - 성한취 사망
본관 창녕 - 경상남도 창녕군
입향지 창녕성씨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 지도보기|연서면 와촌리지도보기|연동면 내판리지도보기
묘소|세장지 성담년 묘비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성중의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와촌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강모재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와촌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문절사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 292-4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성희 유적비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병산사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 351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효자 성이복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와촌리 지도보기
성씨 시조 성인보
입향 시조 성희|성중의|성한취

[정의]

성인보를 시조로 하고 성희, 성중의, 성한취를 각각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세종특별자치시의 창녕성씨금남면 달전리에 회곡공파 성희가 15세기 중엽, 연서면 와촌리에 동고동파 성중의가 15세기 후반, 연동면 내판리에 상곡공파 성한취가 18세기 중엽에 각각 입향하여 세거해 오고 있다.

[연원]

창녕성씨(昌寧成氏)는 고려시대 호장(戶長)을 지낸 성인보(成仁輔)를 시조로 한다. 성인보의 아들 성송국(成松國)은 창녕 사람으로 아버지의 장례를 창녕에서 지냈다고 하며 후손들도 대대로 창녕군에서 세거하고 있다. 성인보의 3세손 성공필(成公弼)과 성한필(成漢弼) 대에 크게 두 계통으로 갈라졌고 6세손에 이르러 판서공파(判書公派), 독곡공파(獨谷公派)[문경공파(文景公派)], 회곡공파(檜谷公派)[문숙공파(文肅公派)], 상곡공파(桑谷公派)[정평공파(靖平公派)], 낭장공파(郎將公派), 판사공파(判事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정절공파(貞節公派), 사인공파(舍人公派), 좌랑공파(佐郞公派), 평리공파(評理公派), 검교공파(檢校公派), 지사공파(知事公派) 등 13파로 나뉘어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성석린(成石璘), 성석용(成石瑢), 성석연(成石珚) 등 창녕성씨 3형제가 조선 개국에 참여하여 고관에 오름으로써 가문의 번성을 가져왔다. 한편으로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1418~1456]을 배출하여 절개로 이름난 문중이 되었다.

[입향 경위]

금남면 달전리 창녕성씨는 회곡공파(檜谷公派)로 회곡 성석용의 후손이다. 입향조 성희(成熺)[?~1464]는 성석용의 손자로 호는 인재(仁齋)이다. 성희는 1456년에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김해로 부처(付處)[벼슬아치에게 어느 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던 형벌]되었으며 가정과 재산을 국가에 몰수당하였다.

김해에서 귀양살이를 한 지 2년째 되는 해 성희는 지령(指令)을 받고 서울의 가족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부강(芙江)까지 올라왔으나 세조가 서울에서 300리[약 120㎞] 떨어져 나가 살라고 명령하여 더 이상 서울로 향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후 성희는 영구적으로 생활할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처음에는 연기군 남면 양화리로 갔으나 여러 가지로 여건이 맞지 않아 다시 금강을 건너 금남면 반곡리를 거쳐 달전리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 후 성희의 아들인 성담수(成聃壽)[?~1456]와 성담년(成聃年)[1441~1483]이 정성을 다해 부친을 모셨으며 성담수가 자식을 두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2019년 현재 달전리에 거주하는 창녕성씨는 성담년의 자손들이다. 후손들은 소파의 파조를 인재공 성희가 아닌 정재공(靜齋公) 성담년으로 삼고 있다. 정재는 성담년의 호이다. 성담년은 형인 생육신 성담수와 함께 사육신 성삼문과 6촌간이다.

연서면 와촌리창녕성씨는 성준득(成准得)[?~?]을 파조로 하는 동고공파(東臯公派)이다. 성준득은 성송국의 증손으로 고려 공민왕 때 총부상서(摠部尙書)를 역임한 문신이다. 와촌리 입향조는 성준득의 4세손으로 통훈대부행인동현감(通訓大夫行仁同縣監)을 지낸 성중의(成仲義)[1443~?]이다. 원래 경기도 파주(坡州) 지역에 세거하였는데 어떠한 이유로 연기 지역에 입향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후손들은 성삼문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성중의가 인동현감을 지냈고 성중의의 아들 성자윤이 1465년(세조 11)에 성환도찰방(成歡道察訪)으로 재임하고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를 찾기도 쉽지 않다. 한편 입향조 성중의의 처는 창녕성씨보다 먼저 와촌리에 거주하던 순흥안씨(順興安氏)이며 이후에도 창녕성씨가 순흥안씨와 혼맥을 이어가는 것으로 보아 처가와의 연고로 입향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연동면 내판리에는 창녕성씨 상곡공파가 입향하였다. 시조 성인보의 6세손인 독곡(獨谷) 성석린(成石璘), 회곡(檜谷) 성석용(成石瑢), 상곡(桑谷) 성석연(成石珚), 덕곡 성석번(成石璠) 등 4형제는 각각 독곡[문경공]파, 회곡[문숙공]파, 상곡[정평공]파, 덕곡[중낭장공]파로 갈라진다. 내판리창녕성씨는 셋째 성석연의 후손인 상곡파이다. 족보에 성석연의 손자이며 세조 당시에 통훈대부를 지낸 취균헌(翠筠軒) 성중성(成重性)의 묘가 청원군 문의면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내판리로 오기 전에 이미 가까운 곳에 거주하면서 연고를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중성은 해남현감, 목천현감, 창평현감을 거쳤는데 창평현감 재직 당시에 족보[기축보]를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묘소를 통해 추정한다면 내판리로 오기 전에 구즉면 금탄리에 살았고 17세손 성한취(成漢就)[1724~1776]가 내판리 입향조로 추정되며 입향 시기는 18세기 중엽쯤으로 추측된다.

[현황]

창녕성씨와촌리에 이거(移居)한 후 온 마을이 기와집으로 들어서게 되자 주위에서는 ‘와리’ 또는 ‘와촌리’라 부르게 되었다. 대실(大室)이라는 마을은 성씨 가문의 정착지로 성씨의 종가이며 부자로 살았다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성준득의 후손으로는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벌하여 3등 공신에 녹훈된 성인산(成仁山), 인조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비인현감(庇仁縣監)을 지내고 가선대부병조참판(嘉善大夫兵曹參判)을 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 받은 성영(成英), 1891년(고종 28)에 효행으로 명정(銘旌)[충·효·열을 행한 사람에게 나라에서 주는 최고의 포상]을 받은 성이복(成爾復) 등이 있다.

창녕성씨 동고공파는 성중의의 4세손인 통덕랑(通德郞) 성여옥(成汝玉)의 후손들이 금남면 달전리에도 거주하고 있다.

[관련 유적]

금남면 달전리에는 1938년에 건립된 인재공 성담년 묘비, 1944년에 건립된 성몽선(成夢宣) 묘표와 성삼문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문절사(文節祠) 등이 있다. 문절사는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매죽헌사우(梅竹軒祠宇)’로도 불린다. 이 외에도 금남면 달전리에는 1975년에 건립된 성희(成熺)의 유적비와 항일의사 성기운(成璣運)을 기리기 위해 고을 유림들이 세운 병산사(屛山祠)가 있다. 병산사는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연서면 와촌리에는 성중의의 묘와 묘갈(墓碣)[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작은 비석]이 있으며 창녕성씨 동고공파의 재실인 강모재(講慕齋)가 있고 성이복(成爾復)[1713~1776]의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가 있다. 효자 성이복 정려는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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