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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626
한자 李惟泰
영어공식명칭 Yi Yutae
이칭/별칭 태지,초려,문헌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강경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07년(선조 40)연표보기 - 이유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34년(인조 12) - 이유태 희릉참봉이 됨
활동 시기/일시 1660년(현종) - 이유태 공조참의가 됨
활동 시기/일시 1661년(현종 2) - 이유태 이조참의가 됨
활동 시기/일시 1663년(현종 4) - 이유태 균전사|동부승지가 됨
활동 시기/일시 1675년(숙종 1) - 이유태 영변으로 유배됨
몰년 시기/일시 1684년(숙종 10)연표보기 - 이유태 사망
묘소|단소 갈산서원 - 세종특별자치시 도움1로 40[어진동 517]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용문서원 - 충청남도 공주시 중등골길 54-7[상왕동 339-4]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경주
대표 관직|경력 희릉참봉|이조참의|공조참의|동부승지|균전사

[정의]

조선 후기 충청오현 중의 한 명으로 세종 지역에 묘를 쓴 문신.

[개설]

이유태(李惟泰)[1607~1684]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태지(泰之), 호는 초려(草廬)이다.

신독재 김집(金集)의 천거(薦擧)[어떤 일을 맡아 할 수 있는 사람을 그 자리에 쓰도록 소개하거나 추천함]로 1634년(인조 12)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었다.

이어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 대군사부에 임명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가 효종 9년(1658년) 우암 송시열(宋時烈), 동춘당 송준길(宋浚吉)의 천거(薦擧)로 지평이 되었다.

이듬해 시강원 진선·집의를 거쳐 현종 즉위 후 공조참의·동부승지를 역임한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였다.

이유태는 송준길, 송시열, 윤선거, 유계와 더불어 충청오현(忠淸五賢)으로 대표되는 인물이다.

[가계]

이유태는 1607년(선조 40) 충청남도 금산군 노동리에서 아버지 유학자 이서(李曙)와 어머니 청풍김씨(淸風金氏) 사이 다섯 아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본래 이유태의 선계(先系)[선조의 계보]는 고려 후기부터 누대(累代)[여러 대]를 서울에 세거하면서 사환(仕宦)[벼슬살이를 함]하고 있었다.

이유태의 부친인 이서가 장형[맏형] 이시(李時)와 함께 임진왜란 후기에 약간의 전장(田莊)을 소유하고 있던 금산으로 내려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활동 사항]

이유태는 15세 되던 해에 당시 진잠의 가둔촌(嘉遯村)에 은거(隱居)[세상을 피해 숨어서 삶]하여 강학을 하고 있던 고청 서기(徐起)의 문인인 민재문(閔在汶)에게 가서 학업을 하였다.

그리고 3년 후인 18세 때부터는 연산의 사계 김장생에게 수업을 들었다. 특히 김장생·김집 부자를 사사(師事)[스승으로 섬김]하면서 김장생의 문인들과 친교를 맺었다. 이때 1년 연상인 동춘 송준길과 동년인 우암 송시열과는 우의가 깊었다.

송준길과 송시열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로, 이유태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유태가 28세 되던 해 김장생의 아들 김집이 천거하여 1634년(인조 12)에 희릉참봉이 되었다. 이어 세자사부(世子師傅)를 지냈고, 1660년(현종 1) 호군(護軍)으로 공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이조참의가 되었다.

1663년(현종 4) 균전사(均田使)·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지냈고, 효종(孝宗) 즉위 후 송시열·송준길 등과 함께 북벌 계획에 참여하였다.

1675년(숙종 1) 효종의 비가 죽으면서 2차 예송논쟁[조선시대 현종 때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복상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크게 논란이 된 예법에 관한 논쟁]이 일자 윤휴 등 남인의 배척을 받아 영변(寧邊)에 유배되었다.

5년 뒤 유배에서 풀려난 이유태는 더 이상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현재 충청남도 공주시 상왕동 중동골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충현서원 원장을 지냈다. 1684년에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이유태가 저술한 시문집으로 『초려집(草廬集)』이 있다. 1865년 후손 이경 등이 간행하였으며, 25권 1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유태가 영변 귀양지에서 아들과 조카에게 써 준 정훈(庭訓)[가정의 교훈]인 ‘초려이유태유고(草廬李惟泰遺稿)’가 현재 전해지고 있다.

[묘소]

이유태의 묘소는 세종특별자치시 어진동에 조성된 초려역사공원 내에 있다.

봉분 앞에는 ‘초려선생지묘정부인평산신씨부좌(草廬先生之墓貞夫人平山申氏祔左)’가 새겨진 상석과 좌우에 망주석 2기가 놓여 있다.

묘역에서 조금 떨어져 곳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상훈과 추모]

이유태는 이조판서에 추증(追贈)[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죽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벼슬을 주던 일]되었고, 금산서원(錦山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1986년 유림들과 후손들이 이유태가 만년을 보내고 후손들이 세거해 온 공주에 이유태를 배향하는 서원이 없는 사실을 안타깝게 여겨 용문서원을 세웠다.

1988년 용문서원에 유물관을 신축하여 이유태의 유물과 관련 문서들을 전시하고 있다. 시호(諡號)[제왕이나 재상,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는 문헌(文憲)이다.

갈산서원(葛山書院)은 초려 이유태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694년(숙종 20) 갈산[현 세종특별자치시 종촌동]에 세웠으나 소실되어 2015년 세종특별자치시에서 초려역사공원을 건립할 때 건물 내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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