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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641
한자 李載九
영어공식명칭 Yi Jaegu
이칭/별칭 계범,불궤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안경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37년(헌종 3)연표보기 - 이재구 출생
몰년 시기/일시 1887년(고종 24)연표보기 - 이재구 사망
출생지 이재구 출생지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덕성서원 -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방축리 성전지구 내덕동
성격 효자|학자
성별
본관 원주

[정의]

조선 후기 세종 지역 출신의 효자이자 학자.

[개설]

이재구(李載九)[1837~1887]의 자는 계범(季範), 호는 불궤재(不匱齋)이다. 조치원읍 봉산리에서 출생하였다.

전재 임헌회(任憲晦)[1811~1876]의 아래에서 수학하며 학문과 의행 실천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학문이 일취월장하였으나 과거는 포기하고 경전 연구에만 몰두하여 강론과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가계]

이재구는 원주이씨(原州李氏) 원성군파 후손이다. 아버지는 효자 이봉환(李鳳煥)[1805~1854]이고, 어머니는 김윤상(金胤相)의 딸 안동김씨이다.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봉환 역시 효행이 뛰어나 동몽교관에 제수(除授)되었으며, 유림의 천거(薦擧)[어떤 일을 맡아할 수 있는 사람을 그 자리에 쓰도록 소개하거나 추천함]로 1922년 효자 포상을 받았다.

[활동 사항]

이재구가 8세 되던 해에 어머니 안동김씨가 설사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의원이 치료가 어렵다고 하자 이재구는 깊은 밤 눈 속에서 혼자 목욕재계하고 집 뒤의 바위 위에서 간절히 기도한 일화가 있다.

또한 한밤중에 제사를 지낼 때 어린 이재구는 부모에게 제사 모시는 시간에 깨워 달라고 부탁하고 잠이 들었는데 부모는 차마 어린 아들을 깨우지 못하였다고 한다. 제사가 끝난 후 잠이 깬 이재구는 제사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하루 종일 슬퍼하며 보냈다고 한다.

부모가 숨을 거두었을 때는 일체의 상제를 『주문공가례』에 따라 3년 동안 시묘하였으며, 심하게 아픈 일이 없으면 시묘를 절대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한편 연기군 조치원읍 봉산리 호계마을에는 이재구와 관련 있는 자교암(慈敎岩)[어머니의 가르침이 있는 바위]이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자교암은 커다란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고 하는데 이재구의 어머니 안동김씨가 아들이 실수를 하거나 문의(文義)[글의 뜻]에 통달하지 못할 경우 종아리를 쳐 가며 공부를 시킨 곳이라고 한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교훈으로 삼기 위하여 바위에 의지하며 마음을 다지곤 하였다고 하며, 제자의 모습을 높이 산 스승 임헌회가 친히 바위에 ‘자교암(慈敎岩)’이라 새겨 주었다고 전해진다.

이재구임헌회 밑에서 수학한 뒤 도학에 전력함에 동시에 14년간을 경전 탐구와 육영사업에 종사하였다.

불궤재라는 호 또한 임헌회가 지어 준 것이다.

[학문과 저술]

이재구는 16세기 주리와 주기 철학을 발전시키는 등 유학의 종장이 된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과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의 학문을 기본으로 하면서 그중 기호학파의 적통(嫡統)[적자 자손의 계통]을 잇고 있다.

또한 스승인 임헌회에게 수학하며 스승의 학풍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한편 이재구의 학문과 사상·학통을 살피는 과정에서 다른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효행으로, 효는 백행의 근본이며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 것이라는 공자의 가르침과 맹자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이재구는 유학의 가르침과 스승에게 학문한 바를 효행의 적극 실천으로 결실을 맺었다. 어버이를 승순(承順)[윗사람의 명령을 순순히 좇음]으로 섬길 것과 상제(喪祭)는 애경(哀敬)으로써 근본을 삼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숭덕사[덕성서원]에 칠현으로 배향(配享)[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문묘나 사당, 서원 등에 모시는 일]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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