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936
한자 烈女慶州崔氏旌閭
이칭/별칭 열녀 윤태풍 처 경주최씨 정려
분야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봉암리 229-1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고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30년연표보기 - 열녀 경주최씨 정려 건립
이전 시기/일시 1980년 - 열녀 경주최씨 정려 이건
문화재 지정 일시 2001년 05월 31일연표보기 - 열녀 경주최씨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25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14년 09월 30일연표보기 - 열녀 경주최씨 정려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25호 지정
문화재 해지 일시 2014년 09월 30일연표보기 - 열녀 경주최씨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25호 지정 해지
현 소재지 열녀 경주최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봉암리 229-1 지도보기
원소재지 열녀 경주최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봉암리
성격 정려
양식 팔작지붕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파평윤씨 문중
관리자 파평윤씨 문중
문화재 지정 번호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25호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봉암리에 있는 윤태풍의 처 경주최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일제강점기에 세운 정려.

[개설]

열녀 경주최씨 정려경주최씨[1842~1866]의 열행을 기리고자 유림과 주민들의 노력으로 1930년에 건립된 유적이다.

경주최씨는 최규(崔珪)의 딸로 옛 대덕군 신탄진에서 태어나 파평윤씨 윤태풍(尹泰豊)에게 출가하였다.

후손들의 전언에 의하면 경주최씨의 시집은 매우 가난하여 남편이 먼 지역으로 품팔이를 떠나고 경주최씨는 병든 시부모를 구걸까지 하면서 봉양하였으나 시부모는 끝내 사망하였다.

설상가상으로 품팔이를 떠난 남편마저 병에 걸려 돌아오자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약을 사서 봉양하였다. 그러나 남편도 결국 사망하였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는데 매일같이 범이 와서 호위하였다고 한다.

[위치]

조치원읍 소재지에서 대전으로 통하는 국도 제1호를 따라 남쪽으로 약 5㎞를 가면 연서면 보통리와 경계를 이루는 봉암리 마을이 나온다.

열녀 경주최씨 정려봉암리 연봉초등학교 동남쪽 길 건너편 북서향 사면의 낮은 구릉 상단부에 조치원-공주 방향 국도 제1호 오른쪽에 있다.

현재 정려 주변은 밭으로 개간하여 경작되고 있어서 넓은 대지가 형성되어 있다.

[변천]

정려는 원래 현 위치에서 100m 아래쪽 동네 한가운데 있었으나 1980년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형태]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갖춘 비교적 화려한 건물이다.

화강석재를 가공한 8각 고주초석 위에 원주를 세우고, 공포는 이익공 양식을 취하고 있다. 정려의 4면은 홍살을 돌렸으며, 정려 안에는 열녀현판과 정려기를 걸어 놓았다.

바닥은 시멘트로 처리하였으며, 정려 주위로는 기와를 얹은 돌담을 돌려 보호시설로 하였다.

[현황]

정려기는 가로 120㎝, 세로 36㎝ 크기의 세자로 조밀하게 써 놓았다.

열녀현판은 가로 175㎝, 세로 40㎝ 크기의 현판에 ‘學生尹公泰 配孺人慶州崔氏孝烈閣’이라 적고 작은 글씨로 ‘孔夫子誕降二千四百八十一年庚午二月日’이라 적어 1930년에 건립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열녀 경주최씨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경주최씨의 열행을 알리려는 후손과 주민들의 노력이 정려 건립으로 이어져 오늘날 열행 실천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