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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1420
한자 人物說話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성배순

[정의]

세종 지역에서 인물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세종 인물설화의 특징]

세종 지역의 인물설화는 주인공과 관련된 자연물 또는 유적·유물 등이 남아 있거나 주인공의 능력 또는 행적 등과 관련한 영웅담이 구전되어 오는 것이 특징이다.

[세종의 주요 인물설화]

세종 지역의 인물설화로는 전의 지역에서 전의이씨 시조인 ‘이도(李棹)’와 관련한 설화와 금남면 달전리에서 성삼문의 당숙인 ‘성희’와 관련한 설화가 전하여 내려온다.

이도 묘는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유천리에 자리하며, 이도 선조들 묘소는 공주 지역에 있다.

이도는 고려 태조 왕건의 후백제 정벌 당시 공을 세운 인물이다. 왕건으로부터 ‘도’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공로를 인정받아 전의 지역의 옛 이름인 전산후에 봉하여졌다.

왕건의 군대가 금강에 이르렀으나 불어난 강물 때문에 강을 건너지 못하자 수백 척의 배를 보유하고 있던 이치[이도의 본래 이름]가 왕건에게 배를 내어 도왔다는 이야기가 세종특별자치시 전의 지역과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성삼문의 당숙 성희는 성삼문이 세조 원년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처형되자 성삼문의 친척이라 하여 10여 차례 국문을 받았다.

그 후 김해로 유배를 갔는데 성희를 호송하게 된 금부도사 윤교영은 평소 성희를 존경해서 깍듯하게 대접하였다고 한다.

당시 성희의 차남 성담년은 열다섯이었는데 호송 행렬을 걸어서 뒤따라 가며 아버지를 보살폈다. 금부도사 윤교영이 모른 척해 줘서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김해부사도 성희의 명성을 알고 있는 터라 의식(衣食)에 불편이 없도록 조처하여 주었다고 한다.

성희는 3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세조는 도성 300리 안에는 들어올 수 없다고 명을 내렸다. 그리하여 성희는 현재 세종특별자치시가 된 금남면 달전리에 머물며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렸다.

당시 달전리 인근에서는 성희를 존경하는 사람이 많아서 인근 토호나 권력 있는 세력가는 물론 서민층까지 성희가 잘 정착할 수 있도록 협력하였다고 한다.

이웃의 청주 목사 이치우마저 사람을 보내 달전리에서의 정착을 도와주었다고 전한다.

성희는 그로부터 6년 후인 1464년[세조 10]에 죽어서야 부친의 묘가 있는 고향 파주 파평산으로 갈 수 있었다.

성삼문을 모신 사당 문절사(文節祠)가 있는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 마을은 창녕성씨 집성촌으로, 성삼문의 당숙인 성희(成熺)가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다.

성희의 두 아들 가운데 큰아들 성담수(成聃壽)[?~1456]는 생육신으로 꼽히는 인물이었으나 후손이 없다. 현재 달전리 성씨는 성희의 둘째 아들인 성담년(成聃年)의 후손들이다.

당시 성희가 자리를 잡고 살던 집이 현재 문절사 아래에 있는 성인모가 살고 있는 집이라는 이야기가 구전되어 전하여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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