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1441
한자 險難-行政都市建設過程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종수

[신행정수도 추진 배경]

충청권 수도론은 무려 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계룡산 밑에 새로운 수도를 만들기로 하고 착공까지 하였지만 풍수상의 문제와 위치가 다소 남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지적에 따라 결국 한양을 수도로 정한다. 지금도 그 ‘도성터’에는 주춧돌이 남아 있고, 그 때문에 그 일대를 ‘신도안’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충청권 수도는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지만 민간에서는 정도령이 계룡산 밑에서 새로운 수도를 세우고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정감록』 이 유행하는 등 충청권 수도론은 계속 잠복하고 있었다.

조선 왕조의 멸망과 민족사 최대 치욕인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그리고 이어지는 분단과 전쟁, 특히 두 번에 걸친 서울 함락은 현대사에 큰 상처일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마음에도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휴전선에서 50㎞도 되지 않은 곳에 수도를 두어야 하냐는 의문을 품게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도권 집중 현상은 갈수록 심하여져 갔다.

1977년에는 서울 인구가 약 760만 명, 수도권 인구가 1,206만여 명으로 늘어나 전국 인구에서 점하는 비율이 각각 20.9%와 33.1%에 이르렀다. 1970년대 말 박정희 대통령은 안보 문제와 수도권 집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임시행정수도 계획안’이란 이름의 행정수도 건설을 추진하였고, 1977년 2월 10일 직접 발표하였다.

이로부터 3년간 후보지 선정부터 투자 재원 마련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 후보지는 공주군 장기면, 지금의 세종시 장군면 일대였다. 하지만 10.26사건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여러 정부를 거쳐 오는 동안 수도권 억제와 국토균형발전을 위한 정책은 지속적으로 실행되었다. 노태우 정부는 관세청·특허청 등 외청의 대부분을 대전 둔산 지구로 이전하는 계획을 세웠고, 이 계획은 김영삼 정부 때 실현되었다. 세종로와 과천 다음의 제3청사라고 불린 대전 청사는 둔산 신도시 활성화에는 크게 기여하였지만 국가 전체적으로 보면 분산 효과는 아주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역대 정부의 국토균형발전 정책은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격차는 더욱더 심화되어 왔다.

결국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는 행정수도 이전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되기에 이른다. 일부에서는 선거전략에 불과하다고 폄하기도 하였지만 실제로 수도 이전 공약으로 인한 충청권에서의 승리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행정수도 이전과 지방분권에 대한 진정성은 세종특별자치시와 혁신도시 건설, 정부부처와 공공기관의 대거 이전으로 증명되었다. 특히 다른 대통령과는 달리 퇴임 이후 고향인 봉하마을 귀향으로 솔선수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결국 노무현 참여정부가 출범한 2003년에 와서는 서울 인구가 1,000만 명을 넘어섰고 수도권 인구는 1977년에 비하여 두 배로 증가함으로써 전국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서울 21%와 수도권 47.4%에 이르렀다. 따라서 전국 인구의 5분의 1이 서울, 절반이 수도권에 집중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지방분권화와 더불어 국토균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전국에서, 그리고 각계각층에서 높게 일고 있었다.

[신행정수도 특별법 제정배경과 과정]

노무현 대통령은 공약 이행을 위하여 대통령 직속으로 국무총리와 김안제 서울대학교 교수를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신행정수도추진위원회를 가장 먼저 만들었다. 위원회 산하에 정부 각 부처에서 차출된 신행정수도추진단을 구성하여 실무를 맡기고, 법·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특별법」의 제정 작업을 시작하였다.

기존의 도시개발 관련 법률로도 신행정수도건설사업 추진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변화된 도시 개발 여건과 추진 조직 구성, 건설 재원 확보, 다양한 도시건설 기법 적용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수도 이전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효율적으로 이끌어 가기에는 한계가 명확하였기 때문에 「신행정수도 특별법」 제정이 추진되었다.[이하 「특별법」]

정부 입안은 2003년 4월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와 위원회 산하에 추진기획단, 실무지원단이 설치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6월 16일 법안은 중앙행정기관·국회·법원 등 83개 관계기관과 협의하여 한 달간의 입법예고와 공청회, 당정 협의, 규제개혁위원회의 규제심사와 법제처의 법안심사 등 절차를 따랐다. 그리고 국무회의를 거쳐 정부안으로 확정되어 10월 21일 국회에 제출되었다.

특별법안은 10월 22일 건설교통위원회에 회부되어 세 차례의 대체토론을 거쳐 12월 8일 의결되었다.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12월 29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어 재석 194명 중 167명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국회를 통과한 특별법안은 헌법에 따라 정부로 이송되었고, 2004년 1월 13일 국무회의를 거쳐 1월 16일 공포되었으며, 부칙에 따라 4월 17일부터 법률적 효력이 발생하였다.

[예정지 선정]

그 사이 각 분야의 전문가 81명으로 ‘신행정수도후보지평가위원회’가 구성되어 균형발전성·개발가능성·보전필요성 등 세 가지 조건을 놓고 예정지 선정에 심혈을 기울여 천안 남부, 음성-진천, 연기-공주, 논산 등 4개 후보지로 압축하였다.

2004년 8월 11일 최종적으로 연기-공주 지역이 선정되었다. 이때 사장되어 있던 ‘백지계획’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행정수도 예정지이던 장기면 지역보다 약 20㎞ 동쪽으로 이동한 위치였다. 25년 전보다 우리나라에서 경부축이 그만큼 강화되었다는 좋은 증거이기도 하다.

행정수도 예정지는 연기군 남면을 중심으로 금강 건너 금남면 일부, 동면[현 연동면] 일부, 공주시 장기면 일부를 포함한 73㎢이다. 최대 규모 신도시이던 분당이 20㎢에 미치지 못하였다. 행정수도의 규모와 예정이긴 하지만 수용 인구는 거의 비슷하니 세종신도시의 밀도가 얼마나 낮은지도 실감할 수 있다.

시행을 맡은 한국토지공사에서는 남북통일 전까지 이보다 더 큰 사업을 할 가능성은 없다고 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다.

[신행정수도특별법 헌법소원 심판]

특별법이 통과되고 예정지가 선정되었다고 해서 사업이 본격화된 것은 아니었다. 세종시 탄생 과정에서는 수많은 시련이 앞을 가로막았다. 시작은 신행정수도특별법 헌법소원 심판이었다. 여기서 핵심적 역할을 한 세력은 ‘수도이전반대 국민연합’이었다.

국회에서 「특별법」이 심의 중이던 2003년 11월 주로 서울에 기반을 둔 학계 및 언론계, 원로정치인, 법조인 등이 주축이 된 ‘신행정수도 재고를 촉구하는 국민포럼’이 발족되었다. 특별법 공포 이후인 2004년 5월 4일에는 ‘수도이전반대국민연합’으로 개칭하였다. 이들은 이명박 시장의 서울시와 함께 대리인으로 이석연 변호사 등을 선임하여 7월 12일 「특별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에 제출하였다.

청구인들은 「특별법」 제정과 시행으로 인하여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받게 되어 위헌이라고 주장하였다.

첫째 수도 이전 문제는 헌법 제72조의 외교·국방·통일 등 국가 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에 해당되어 국민투표에 부쳐야 함에도 하지 않았다.

둘째 세금이 위헌 법률에 사용됨으로써 납세자로서의 권리를 침해받았다.

셋째 입법 과정에서 공청회를 생략하여 청구인들의 청문권을 침해받았다.

넷째 수도 이전으로 서울시 공무원들이 공무담임권과 직업수행의 자유를 침해받았다.

다섯째 이전 지역을 충청권으로 미리 정한 것은 평등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대응 방안을 만들었다.

첫째 수도의 법적 지위에 대하여 우리나라 헌법은 물론 법적 규정도 없으므로 현재의 법제로 수도 이전에 관한 법률은 입법 절차를 밟으면 충분하다.

둘째 국민투표권을 침해하였다는 주장에 대하여는 신행정수도 건설이 국가 전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책이지만 국가 안위에 영향을 미친다고 단정하기 어려우며, 설령 중요 정책이라 하여도 국민투표 부의는 의무 사항이 아닌 대통령의 재량 사항이다. 외국에서도 수도 이전을 국민 투표로 결정한 사례는 없으며 대부분 근거 법률을 제정하여 추진하였다는 것이다.

[특별법 위헌 결정]

헌재 전원재판부는 「특별법」 헌법소원 심판에 대한 선고 기일을 10월 21일 오후 2시로 정하고 공식 발표하였다. 결론은 8인의 다수의견 및 별개의견에 의하여 「특별법」의 위헌이 선고되었다. 이를 요약하면 “수도가 서울인 점은 관습헌법에 해당하고, 관습헌법도 헌법의 일부이므로 헌법 개정 절차에 의하여서만 변경될 수 있는데 신행정수도 「특별법」은 헌법 개정 절차 없는 수도 이전을 내용으로 하고 있으므로 헌법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권을 규정한 헌법 제130조에 위반한다.”라고 심판하였다. 다만 정부 부처의 일부 이전은 위헌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도올 김용옥은 지금까지 법실증주의에 충실하게 성문헌법주의만을 고수하여 오던 헌재가 불문헌법론을 동원한 것은 신행정수도특별법을 위헌으로 만들기 위하여 모든 논리를 동원한 셈이라며 기고문을 통해 비판하였고, 행정수도 건설을 반대하는 시민들조차도 관습헌법이라는 낯선 단어에 의아해 할 정도였다.

헌재의 결정 주문에 의하여 2004년 1월 16일 공포한 「특별법」은 2004년 10월 21일부터 효력이 정지되었고, 관련된 조직 및 계획은 무효화되었다.

분노한 연기군 주민들은 ‘신행정수도 지속추진 연기군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투쟁에 나섰다. 연기군 역사 이래 최대 인파가 조치원역 광장에 모였을 정도였다.

이후 이듬해까지도 충청권에서는 매일같이 집회와 시위가 이어졌다. 덧붙이자면 헌법재판관 중 위헌 결정에 가장 앞장선 권성 재판관은 연기군 전동면 출신이다.

[행정중심복합도시특별법 제정과 2차 위헌 심판]

정부에서는 2004년 11월 18일 국무총리와 최병선 교수를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신행정수도후속대책위원회를 출범시키고 2004년 12월 17일 개최된 제2차 회의에서 발표한 ‘대안선택의 5대 원칙’에 따라 공론화 과정에서 제시된 11개 대안을 검토·평가한 결과 2005년 1월 12일 제3차 회의에서 ‘행정특별시안’, ‘교육과학연구도시안’을 유력한 대안으로 압축하고 후속 과업을 국회 특위에 넘겼다.

2004년 12월 8일 구성된 국회의 ‘신행정수도 후속대책 및 지역균형발전 특별위원회’에서는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2005년 2월 5일 151인 의원의 발의로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공주지역 「행정도시건설 특별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주요 골자는 총리실과 12부처 및 177개 공공기관의 이전이었다.

이어 2005년 2월 17일 특위 소위원회 제7차 회의에서 특별법안 명칭은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을 위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으로 하고, 정부예산 규모를 최대 8조 5,000억 원으로 축소하며, 효율적인 사업 추진을 위하여 차관급을 장으로 하는 건설청 설치 등을 내용으로 하는 후속 대안에 대하여 합의하였다. 정부 부처 이전 범위에 대해서는 2월 23일 국회 특위 제7차 회의에서 여·야가 합의하기에 이르렀고, 같은 날 건설교통위원회에서 「특별법」이 수정·의결되었다.

본회의에 상정된 특별법안은 투표 결과 재석 177인 중 158인의 찬성으로 의결되었다.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3월 18일 공포되었다. 「특별법」의 제정 단계부터 반대 세력에서 헌법소원을 또다시 제기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는데 역시 반대 세력은 「특별법」에 대한 위헌확인 헌법소원을 헌법재판소에 제출하였다. 그들이 헌법소원을 제기한 이유는 지난번과 유사하게 총리실과 12부를 이전하는 것은 수도 분할이어서 관습헌법 사항이므로 개헌 절차를 밟아야 하며, 총리실과 12부 및 177개 공공기관의 이전은 중요한 국가정책이므로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이런 사태를 예상하였기에 적극적으로 대응 방안을 마련하였다.

한편 헌재의 전원재판부에서는 심리와 토의에 의한 첫 평의가 10월 6일 개최되었고, 11월 3일 최종 평결이 열린 것으로 알려졌다.

헌재는 「특별법」 위헌확인 헌법소원에 대한 선고 기일이 11월 24일 헌재 대심판정에서 있을 것이라고 통보하였다. 11월 24일 오후 2시 「특별법」 위헌확인 헌법소원에 대한 결정문을 발표하였는데 청구인들의 심판 청구를 각하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1년간에 걸친 법률적 논쟁에 겨우 마침표를 찍고 본격적인 건설사업 추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비록 행정수도에 비하면 반토막이 난 상태였지만 연기군민과 충청권 주민들은 더 이상의 갈등은 국가적 재앙이 될지도 모르기에 결정을 수용하였다. 이후 빠른 속도로 토지 보상이 진행되었다.

[세종시 명칭 확정]

행정중심복합도시 명칭은 국민 공모를 거쳐 전문가의 심사로 복수 추천되었고, 최종적으로 2006년 12월 21일 ‘세종시(世宗市)’로 확정 발표되었다. 사실 ‘세종’ 이라는 이름은 국민 공모에서 한울과 금강에 이어 3위를 하였고, 2차 국민선호도 조사에서도 3위에 그쳤다. 하지만 한울은 우리말이라는 장점에도 발음상 국제성이 떨어져 제외되었고, 금강은 지역적 한계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세종은 우리 민족 최고의 성군이고, 세상의 으뜸이라는 뜻도 있는 데다 영어 발음에도 문제가 없어 채택되었다.

세종시 관내에 세종대왕의 눈을 치료한 전의초수, 세종 시기의 명신 절재 김종서의 무덤, 집현전 학사 성삼문의 사당 등이 있는 등 연고성도 어느 정도 뒷받침되었다. 3위였음에도 국민 여론이 호의적이어서 큰 문제 없이 ‘세종특별자치시’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2007년 7월 20일 역사적인 기공식이 현장에서 거행되었으며, 이로부터 본격적인 건설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세종시의 산고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백지화 시도]

2007년 9월 12일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행복도시건설청을 방문하였다. 박근혜 후보와 치열하게 전개된 경선을 박빙의 차로 이긴 지 3주 만이었고, 첫 지방 방문지이기도 하였다.

이 자리에서 행복도시를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고 다짐하였고, 연기군민의 염원이 담긴 황금복숭아를 받기도 하였다. 서울시장 시절 행정수도와 행정도시 반대에 앞장선 전력 때문인지 경선 한참 전인 2006년 12월 13일 충북대학교 특강 때부터 “행정도시는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어도] 변경할 계획이 없다”며 태도를 바꾸었고 대통령 당선 전 16차례, 대통령 취임 후 4차례나 차질 없는 세종시 건설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 충청 지역 행사에서 한 발언이었고, 취임 후 청와대에서 한 두 차례 약속도 야당 대표가 참석한 자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즉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만 행복도시 추진을 약속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명박 후보는 12월 19일 대선에서 충청권에서도 압승을 거두었고, 남인희 건설청장을 유임시키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하였지만 그동안의 약속은 위장 전술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은 취임 이후 증명되었다.

건설청의 예산과 조직이 축소되었고, 세종시의 법적 지위를 확정할 설치법 통과와 행정기관 이전 변경 고시가 계속 지연되었다. 대통령 직속 조직인 행정도시건설추진위원회가 국토해양부 소속이 되면서 위원장도 국무총리에서 장관으로 격하되었다. 또한 행정수도와 행복도시를 반대하던 인사들을 정부의 주요 보직에 임명하였다.

일부 민간단체와 언론, 학계에서 세종시 수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등장하였고, 일부 수도권 한나라당 의원들의 반대 주장도 끊이지 않았다. 이런 정황을 볼 때 2008년 봄에 일어난 광우병 촛불 시위가 없었다면 백지화 시도는 더 일찍 시작되었을 것이 확실하다.

결국 세종시 건설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입장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2009년 9월 개각에서 정운찬 전 서울대학교 총장이 국무총리에 지명되었다. 정운찬 국무총리 지명자는 공주시 출신이었음에도 경제적으로 효율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원안 수정을 하여야 한다는 폭탄 발언을 하면서 소위 ‘세종시 수정론’, 실질적으로는 세종시 백지화에 시동을 걸었다. 충청권 여론은 들끓었고, 시민사회와 야당들도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바로 수도권에 거주하는 보수·기득권 인사들을 중심으로 수도분할저지국민캠페인이라는 조직이 백지화를 위한 여론 조성에 나섰다. 주류 언론들의 동조도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이에 충청권 주민들과 시민사회는 똘똘 뭉쳐 맞섰고, 연기군 주민들은 조치원역 광장을 중심으로 세종시 사수 투쟁에 나섰다. 세종시가 무산되면 혁신도시도 흔들린다는 우려가 퍼지면서 영·호남과 강원 지역의 시민사회 단체들도 반대에 나섰다.

이명박 정부는 11월부터 세종시 민관합동위원회를 구성하여 세종시 수정안을 공론화하였고, 같은 달 27일에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세종시 수정안을 공식화하기에 이른다. 이후 세종시를 교육과학 중심도시로 수정하겠다는 여당 주류파와 원안대로 추진하여야 한다는 야당·여당 반대파가, 심지어 수도권과 비수도권까지 치열하게 맞섰다. 2010년 1월 11일 교육과학 중심도시로 변경한다는 개정안이 발표되었으나 야당과 충청권 여당 의원들의 극심한 반발을 샀다. 그리고 그해 실시된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여당의 패배, 특히 충청권에서의 참패로 추진 동력을 거의 잃었다.

개정안은 결국 6월 29일 본회의에서 야당과 친박의 결집으로 찬성 106, 반대 164, 기권 6으로 부결되며 원안인 행정복합도시로 개발하는 방안이 확정되었다. 이로써 세종시에 관한 논란과 갈등은 가라앉았고, 2004년 행정수도 위헌 판결 후 기득권 세력의 집요한 세종시 파기 요구는 결국 좌절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 실제로는 백지화 시도는 1년 가까운 시간과 막대한 국가적 역량을 낭비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이후에도 건설예산을 30% 이상 축소하고, 주변 지역의 마구잡이 개발을 방조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세종시 건설을 방해하는 꼼수를 서슴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건설 공사 기간은 최소한 3년 이상 지연되었고, 지금까지 적지 않은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종시의 법적 지위 결정과 출범]

세종시는 지켜졌지만 법적 지위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았다. 참여정부 시절부터 세종시를 기존 광역자치단체와 같은 급으로 독립시킬 것이냐, 경기도 산하인 과천시처럼 충남도 산하의 특례시로 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많은 논란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연기군은 전자, 충청남도는 후자를 각각 선호하였다. 군 면적의 거의 절반을 떼어 주어야 하는 연기군민들 사이에서는 군 전체의 세종시 편입을 원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참여정부는 2007년 5월 세종특별자치시를 만드는 입법 예고안을 발표하였다. 건설 지역과 주변 지역 297㎢를 행정구역으로 하고 충청남도에 속하지 않은 광역자치단체로서 산하에 자치 지구가 없는 특수한 지위를 갖는다는 내용이었다.

연기군과 충청남도는 모두 불만이었고, 공주시는 시세 위축과 세수 감소를 이유로 남양유업이 포함된 장기면 일대의 편입을 반대하였다.

이런 와중에 「세종특별자치시설치법」(이사 설치법)은 국무회의를 통과하였지만 17대 국회에서는 통과되지 못하고 18대 국회로 넘어갔다. 이명박 정부의 백지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 사이 「설치법」 은 여론을 반영하여 연기군 전역과 공주시 의당면·장기면·반포면, 충청북도의 부용면을 포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설치법」은 참여정부에서 법률안을 제출한 지 3년 5개월 만인 2010년 12월 27일 제정·공포되었다. 정식 출범은 2012년 7월 1일이고 초대 시장은 19대 총선일인 2012년 4월 11일 함께 선출하기로 결정되었다.

이후 시청 위치 등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이명박 정부의 사실상 마지막 해인 2012년 7월 1일 드디어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하기에 이르렀고, 10월부터 국무총리실을 위시한 중앙부처의 이전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초대 시장은 마지막 연기군수 유한식이었고 초대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인 이춘희 현 시장이 뒤를 이었다. 연기군의 기반과 역사 위에 세종시가 탄생하였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절묘한 배합일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