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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1455
한자 世宗市-集團民俗-龍岩-龍岩-
이칭/별칭 조리지희,시구지희,혈하의,견구,발하,줄다리기
분야 역사/전통 시대,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용암리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이경순

[줄다리기의 유래와 의미]

용암강다리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용암리에서 정월 보름날 행하고 있는 마을 전통 민속놀이이다.

본래 강다리는 충청도의 연기군과 공주 지역에서 행하던 민속놀이였다. 지금은 세종특별자치시의 용암리만이 맥을 이어 오는 민속행사이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400여 년 동안 진행하여 왔다고 한다.

강다리기는 조리지희, 시구지희, 혈하의, 견구, 발하, 줄다리기 등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어 왔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줄다리기를 의미한다. 충청도 지역에서 줄다리기를 ‘강다리’라 지칭한다.

강다리는 여러 사람이 모여 편을 나눈 다음 준비한 줄을 당겨서 상대편이 끌려오게 하여 승부를 내는 놀이다. 강다리에 쓰는 줄은 보통 짚이나 칡으로 엮어 만들어 왔지만 요즘에 와서는 동아줄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

정월대보름은 음력 1월 15일인데 강다리는 이튿날인 1월 16일에 한다. 이유는 보름보다 16일의 달이 더 밝기 때문이다.

줄다리기가 동남아시아 일대에 주로 농경이나 어로를 주된 생업으로 하는 해안이나 평야 지대에서 유래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우리나라의 줄다리기는 중부 이남 지역과 경상도의 진주, 창녕, 안동, 경주 등과 멀리로는 제주도에까지 분포되어 있었다고 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8월 한가위 편에 보면 ‘제주도 풍속에 매년 8월 보름날 남녀가 함께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조우로 편을 갈라 큰 줄의 양쪽을 잡아 당겨 승부를 겨룬다. 줄이 만약 중간에서 끊어져서 양편이 모두 땅에 엎어지면 구경꾼들이 크게 웃는다. 이를 조리지희(照里之戱)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 풍속편 인색(引索)[줄다리기]에 ‘경기도·전라도·경상도의 정월 15일 풍속에 짚 또는 칡으로 큰 줄을 수십 발이나 되게 길게 꼬고 줄의 양 머리에 수많은 작은 줄을 매달아 몇몇 마을이 둘로 편을 갈라 줄을 서로 잡아당기어 승부를 가린다. 이기는 편에 풍년이 든다고 말하는데 이것을 줄다리기라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들처럼 정월초에 어디든지 있는 기년(祈年)[풍년이 들기를 빎] 또는 점풍(占豊)[정초에 그해 농사의 풍흉(豊凶)을 알아보기 위하여 치는 점]의 한 습속(習俗)[습관이 된 풍속]인 원시 형태의 소박한 행사이므로 우리나라 외에 이웃나라에도 비슷한 풍속이 있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중국의 양자강 중류 유역을 중심으로 한 형초 지역의 세시기]에 한식(寒食)의 행사로 타구(打毬)[옛날 운동의 한 가지], 추편(鞦鞭)[그네], 시구지희(施鉤之戱)가 나온다. 시구지희는 대나무 껍질[죽피(竹皮)] 등으로 동아줄을 꼬아 몇 리[수리(數里)]에 걸쳐 놓고 북을 치고 떠들면서 서로 잡아당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중국에서는 한(漢)나라 이후 발하(拔河)라는 강을 사이에 두고 하는 줄다리기가 있다. 한대(漢代)에는 정월 15일에 대나무 껍질로 엮어 만든 큰 줄을 썼으나 지금은 청명(淸明)에 마환(麻桓)으로 만든 길이 40~50장(丈)의 줄 양 머리에 작은 줄 수백 가닥을 단 다음 줄 가운데에 큰 기(旗)를 세워 경계를 삼고, 북을 치고 떠들면서 양편이 서로 줄을 잡아당기어서 끌려가는 편이 지는 것이라 하였다.

기원에 대하여 초(楚)와 오(吳)의 양국이 싸울 때 발생하였다고 전하는 점으로 보아 양자강(揚子江)을 따라 하구 지방까지 분포되어 있었을 것이다.

줄다리기에는 의미가 다양하게 있다.

첫 번째는 자연과의 투쟁이다. 농어민(農漁民)들의 생활은 자연환경 변화의 영향을 직접 받는다. 폭풍우·홍수·가뭄은 가꾼 농작물은 물론 농토마저 황폐화시키고, 고기잡이 활동에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자연과의 끊임없는 투쟁 속에 생활을 영위하여 가는 농어민의 공동체 의식을 일깨우고 풍요한 생산을 바라는 농어민의 생활 의지를 나타낸다.

두 번째는 종교적인 의미이다. 당산굿[마을신이 모셔져 있는 당 앞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치는 농악]을 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굿을 하기 며칠 전에 집집마다 짚을 추렴[모임, 놀이, 잔치 등을 치르는 비용으로 여럿이 각각 일정량을 내어 거둠]하여 마을의 넓은 마당에서 큰 줄을 만들어 줄다리기를 한 후에 제수를 앞세우고 굿패의 ‘길굿가락’에 맞춰 흥겹게 춤추면서 당산으로 간다. 줄다리기에서는 가득 찬 보름달을 바라보며 여자가 이겨야 한다고 하는데 이유는 풍요다산(豊饒多産)을 상징하는 월신(月神), 즉 여신을 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많은 사람이 모여 줄을 당기는 행위를 통하여 공동체가 화합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다. 단합된 힘은 농사일에 서로 품앗이나 두레로 이어져 풍년을 일구고 마을의 화목을 이끈다. 줄다리기는 이미 승부가 결정된 상태에서 행하는 놀이이다. 그러므로 승부에 크게 집착하기보다는 서로 당기고 끌리는 행위 자체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민속놀이는 놀이의 전승과 놀이를 하는 시기에 따라 세시(歲時)놀이와 평상시 놀이로 분류된다. 민속놀이 내용은 거의가 풍작을 기원하는 것이다. 세시놀이에는 명절이나 특정한 시기에 하는 놀이로 정초의 연날리기와 널뛰기, 정월 첫 쥐날의 쥐불놀이, 대보름의 줄다리기·고싸움·윷놀이가 있다. 줄다리기를 하는 시기는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주로 5월 단오날과 8월 한가위 등 명절날과 정월대보름날에 성행되어 왔다.

줄다리기가 남자편과 여자편으로 나누며 줄을 암줄, 숫줄로 표현하는 것은 다산을 상징한다. 줄다리기 행위 자체를 남녀 성행위로 비유하여 모양 또한 암줄에다 숫줄을 넣고 비녀목을 꽂아 고정시킨 후 당긴다. 줄다리기에서 여자가 이겨야 한다고 하는데 다산을 위한 생산의 모체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줄다리기 종류는 크게 셋으로 나눈다. 외줄과 쌍줄, 게줄로 나타낸다. 외줄은 최근까지 각종 행사에서 가장 많이 하는 형태이며, 쌍줄 및 게줄의 변형이라 보아도 된다.

[용암강다리의 연원 및 변천]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용암리(龍岩里)는 백제 때 두잉지현(豆仍只縣)에 속하였다. 통일 신라 시기에는 연기(燕岐)로 고쳐지고, 조선 후기에 연기군 서면으로 연기군에 속하게 되었다. 1917년 조치원면이 신설됨에 따라 북면의 9개 리에 편입하였다가 연기군(燕岐郡) 1읍 7면 중에 한 면이 되었다. 세종특별자치시의 출범으로 연서면이 되었다.

금당산(金堂山)에 용이 거(居)하고 있는 것 같은 용바위가 있으므로 용암(龍岩)이라 불렀는데 용암리에는 작게는 용암동(龍岩洞), 위양골, 숯거리, 위지울[우줄], 톡족골, 안양골, 사기장골, 솔티, 멍에논, 금당(琴堂) 등의 마을이 있다.

용암 저수지에 잠긴 마을이 위양동(渭陽洞)이다. 위양동이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쓰였는지 모르지만 예전의 풍수가들이 위양동 마을이 물에 잠긴다는 말을 많이 하였다. 위양(渭陽)의 위(渭)자는 밭[田]이 물[水]에 잠겨 달[月]이 비춘다는 뜻의 글자이고, 위수(渭水)는 맑은 물이란 뜻에서 저수지가 생길 것을 예견하였다고 전한다.

강다리는 줄다리기의 우리식 이름이다. 그리고 용암 주변 마을에서 행하던 옛 놀이인데 이제는 모두 사라지고 용암리만 맥을 이어 가고 있다. 특히 세종 지역과 공주 일대에서 행하는 줄다리기를 지칭하는 것이 강다리이다. 강다리에서 강은 ‘줄’을 지칭하고 다리는 ‘줄다리는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강다리는 여자가 이겨야 풍년이 들고 마을이 편안하다고 하는 이미 결정된 승부를 가지고 행한다. 생산의 모체인 여자를 편안하고 즐겁게 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자가 즐겁고 편안하여야 집안에 화평이 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생각일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힘이 센 남자는 침략국인 일본을 상징하고 약자인 여자는 조선을 상징하여 여자가 힘이 강하여야 극복한다는 의미이다. 강다리가 임진왜란 시기 왜적의 침략에 대항하여 힘을 기르자는 의미로 시작되었다는 유래를 바탕으로 한 해석이다.

[용암 강다리의 차례와 보존]

강다리는 정월 보름에 행하는 민속놀이이다.

강다리에 쓰이는 비용은 풍물놀이패가 지신밟기를 할 때 집집마다 성의껏 낸 돈을 자금으로 한다.

강다리 10일 전 마을 사랑방에 모여 우선 제관을 뽑는다. 생기복덕으로 사람을 골라 제관, 축관, 공양주를 선출한다. 뽑힌 사람은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조심하여 부정이 타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한다. 제관들은 집 앞에 황토 흙을 양쪽에 놓고 대문에는 금줄을 친다. 금줄에는 솔가지와 창호지를 끼운다. 마을 사람들 또한 제관들이 부정을 타지 않도록 협조하여 마을 자체가 신성하도록 노력한다.

강다리기를 위한 과정은 강줄 만들기를 시작으로 용대[용목]구하기-지신밟기-수신제 지내기-목신제 지내기 순으로 진행된다.

강줄만들기는 음력 1월 16일에 각 마을 사람들이 준비한 짚단을 가지고 마을 중심지로 모여 남자 세 명이 한 조가 되어 강줄을 꼰다. 20㎝ 정도의 나무토막을 들고 나무에 짚을 연결한 다음 줄의 굵기가 일정하게 세 가닥이나 두 가닥으로 마을 사람의 수와 비례하게 줄을 꼰다. 용대[용목]로는 소나무를 베어서 쓰지만 가볍고 다루기 쉬운 미루나무나 다른 나무를 쓰기도 한다. 나무의 위와 아래에 줄을 매달았을 때 빠지지 않도록 아랫부분은 두껍게 하고 윗부분은 가지를 살려서 벤다. 나무를 마당으로 옮겨 강줄을 용대에 입히는 작업을 하여서 5~6m 되는 것을 주민 수에 맞춰 게발처럼 매단다.

강다리 준비가 끝나면 남자들은 술을 한 잔 하고 풍물을 구성한다. 풍물꾼이 도착하면 장독대, 부엌, 우물[수도]에 정화수를 떠놓고 풍물꾼을 맞는다.

풍물꾼은 우물에 제일 먼저 치성을 드린다. 충청도 웃다리 농악의 진수인 칠채가락을 치고 풍물꾼들은 상쇠의 덕담에 맞추어 장단을 친다. 우물에서는 상쇠가 ‘뚜루세 뚜루세 물구녕을 뚜르세, 들이세 들이세 온갖 만복을 들이세’라고 하면서 신명나게 풍장을 치고, 주인은 두 손을 비벼 가며 고개를 연방 숙이면서 정성을 다한다.

우물 정성이 끝나면 부엌으로 들어간다. 부엌에서는 상에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풍장이 끝나면 술 한 잔을 대접한다.

부엌이 끝나면 장독대로 옮긴다. 장독대에는 짚을 깔고 놓은 그릇에 쌀을 넣은 다음 촛대를 꽂은 후 정화수를 떠 놓고 주인이 치성을 드린다.

수신제 제물은 공양주가 가게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흥정하지 않고 사서 보자기에 싼 다음 신속하게 가져옴으로써 부정을 타지 않도록 한다.

해가 서산에 넘어갈 무렵 여자들은 마을 우물가로 몰려와 수신제를 지낸다. 집집마다 장독대에 시루를 놓고 우물가에 시루, 삼색실과, 촛대, 소지를 준비한다. 우물에 떡시루를 놓고 시루 앞에 짚을 깐 후 과일을 놓는데 사과, 배, 감, 대추, 밤을 함께 놓는다. 시루 양쪽에 명태를 꽂아 놓고 명태 앞에 촛불을 켜 놓는다. 어둠이 짙어지면 여자들은 동서남북을 향하여 합장하며 절을 하고 소지를 올린다. 먼저 마을 소지를 올린 다음 각 개인소지를 올린다. 몸이 아파 참석하지 못하였거나 부득이한 사정에 의하여 참석하지 못한 사람이나 객지에 나간 사람을 위하여 소지를 올려 준다. 때로는 집에서 기르는 소를 대상으로 가축 소지를 올리기도 한다.

수신제가 끝날 무렵 마을 청년들은 낮에 만든 횃불에 불을 붙이고 둥구나무 앞을 깨끗이 하고서 제물을 차린다. 떡시루에 쌀을 넣은 그릇을 놓고 촛대를 꽂는다. 여자가 중심인 수신제에 비하여 목신제는 남자들이 맡아서 한다. 풍물꾼들이 풍장을 치며 둥구나무로 향하고, 마을 사람들이 풍장의 뒤를 따른다. 달이 떠오르기 전에 풍장을 멈추고 제를 시작한다. 향을 사르고 잔에 술을 부어 술잔을 올긴다. 제관이 두 번 절을 한 다음 축을 읽고, 참석한 사람들이 연령순으로 모두 잔을 올리고 나면 음복을 한다.

목신제가 끝나면 풍물꾼들은 다시 풍장을 신나게 치며 마을 사람들을 강다리가 준비되어 있는 곳으로 인도한다. 남녀노소 모두가 모이면 마을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어른이 마을사람들에게 당부의 말과 1년의 태평을 기원한다는 말을 한다. 말이 끝난 후 여자는 암줄, 남자는 숫줄로 모여 강다리 준비를 끝내면 인사말을 한 노인이 징을 세 번 친다. 세 번째 징이 울릴 때 사람들이 일제히 강줄을 잡아당기는데 서로 구호를 외치기도 한다.

으레 처음은 남자가 이기게 된다. 두 번째까지 여자편이 지면 세 번째 판에서는 작전을 바꾸어 마을 할머니들이 가시나무를 준비한다. 징소리에 사람들이 줄을 잡아당기면 할머니는 슬그머니 남자편으로 가서 힘센 장정 서너 명의 손등을 가시나무로 때린다. 장정들은 줄을 놓아 결국 지게 된다. 강다리가 끝날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이긴 쪽과 진 쪽이 서로 어우러져 신명나게 춤을 추고, 풍물꾼들은 흥을 돋운다.

강다리는 줄다리기처럼 3판 2승이나 5판 3승으로 결정짓는 것이 아니다. 승패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연달아 계속하고, 지치면 쉬었다 하기도 한다. 짓궂은 남자들은 귀엣말로 상의하여 힘을 바싹 주다가 셋을 세고는 동시에 손을 놓아 여자들이 모두 넘어지게 하여 웃음을 만든다. 넘어진 여자쪽은 이겨서 좋아하고 남자쪽은 졌지만 여자들이 넘어진 광경을 보고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러면 노인들은 ‘올해는 마을에 풍년이 들고 액운은 나가고 운이 들겠구나!’라고 소리친다. 이때쯤이면 달은 머리 위에 올라와 있고, 마을은 온통 웃음소리와 춤사위에 덮이게 된다. 징을 쳐서 알리면 강다리 축제는 막을 내린다.

[지역문화 전승의 중요성과 과제]

지역의 문화, 향토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해당 자료의 부족과 정리되지 않은 이설이다. 자료 부족은 문화자원을 왜곡시킬 수 있고, 문화자원 활용에 큰 문제가 되기도 한다.

용암강다리를 문화자원으로 활용하려면 문화 특성이 살아 있는 다양한 콘텐츠 조사와 소프트웨어 개발에 노력하여야 한다.

용암강다리를 문화자원으로의 활용 과제는 첫째 용암강다리만의 특색과 유적, 둘째 행사 참여자의 연대감 유지, 셋째 용암리 지역의 전설과 지명의 스토리텔링 및 강다리기 시연 기록의 수집·정리 필요성을 제안한다.

첫째 용암강다리만의 특색과 유적을 살피는 과제의 우선 순위는 용암리 용바위의 실제적 보존이다. 전설, 지명, 일화를 총정리하는 것도 필요하다. 구전과 전설을 수집·정리·분석해서 해당 시대의 사정과 용암의 특수한 모습을 살펴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용암강다리의 특성으로 먼저 할미당에 가서 치성을 드리는 이유를 널리 알리는 일도 필요하다. 전통사회에서 할미당과 할아버지당이 따로 있는 마을에서는 먼저 할미당에 가서 치성을 드리고 할미당의 당목에 줄을 감는다. 이것을 “당목에 옷을 입힌다”고 하며, 이렇게 매년 당줄을 갈아 주면 할미신의 은덕을 입어 풍년이 든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부터 줄다리기란 이름을 쓰지 않고 제주도에서는 ‘조리지희’라 불렀고, 보편적으로 ‘시구지희, 혈하의’라 하였다. 당나라 견문록에는 ‘견구, 발하’라 하였으며, 충청도 일대에서는 줄다리기라 하지 않고 ‘강다리’라고 하였다. 줄다리기는 우리의 고유 이름이라기보다 일본에 의하여 일본식 놀이로 변질된 것으로 여겨진다. 편리성에 기초한 외줄 줄다리기는 승부에 집착하는 일본식 줄다리기라고 한다. ‘강다리’라는 우리식 표기 자체가 신선하게 보인다. 수백년을 이어 온 민속이기에 강다리를 보존 계승하기 위하여 강다리 이름에 대한 유래와 하는 순서 등을 적어 놓는 일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행사 참여자의 연대감 유지 보전 과제는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용암리의 강다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도 한 해를 거르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면서 행하고 있는 강다리를 보전·전승할 필요성이 요구된다. 민속놀이는 놀이가 전승되고 있는 집단의 성격에 따라 전문인들의 놀이와 일반인들의 놀이, 놀이를 하는 시기에 따라 세시(歲時)놀이와 평상시 놀이 등으로 분류된다. 놀이를 하는 성별에 따라 남자놀이와 여자놀이, 놀이를 하는 인원에 따라 집단놀이와 개인놀이 등으로도 나눌 수 있다. 용암강다리는 일반인들의 놀이, 세시 놀이, 집단놀이이다. 일반·세시·집단 놀이라면 당연히 행사 참여자의 결속은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전통사회의 급속한 해체를 이유로 민속놀이의 보전을 지역민에게만 책임 지워서는 안 될 것이다.

수신제는 여자, 목신제는 남자가 각각 지내는 특징이 있다. 수신제와 목신제가 끝나고 남녀가 모두 모여 강다리를 하는 것은 화합을 강조한 사항이다. 현대적 의미로 동성 집단의 학생들에게 복장 구별로만 참여하게 하여 보전하는 방법도 강구하여 볼 만하다. 세종 지역 중학교 운동회나 특별활동 시간에 강다리 과목을 넣어 강다리를 직접 배우고 시연하여 보면 자연스럽게 보급되고, 해당 학교는 강다리 학교라는 전통을 획득하게 된다. 세시놀이는 대개 풍년을 기원하고, 사악한 악귀를 물리치며, 액을 막고 복을 부르는 토속신앙의 의미를 띠고 있다. 특히 정월의 집단놀이는 승부에 따라 그해 농사의 풍흉(豊凶)을 점쳐 보는 일이다. 용암리는 대형 저수지 축조로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가 현저히 저하되었기에 새로운 동력원의 지속 발굴도 시급하다.

셋째 용암리 지역의 전설과 지명의 스토리텔링, 강다리기 시연 기록의 수집·정리 필요성 과제이다. 용암강다리[1994년 2월 25일 채록, 송창헌, 남, 1906년생 연기군 서면 용암리]는 400여 년 전부터 하여 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의 향토오락』에는 ‘충청남도 연기지방의 놀이 가운데 줄다리기가 있는데, 이는 정월에 거행하며 일반인들이 모두 참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시기 용암리 가까이에 있는 비암사(碑岩寺)에 왜군이 쳐들어 왔다. 당시 비암사는 수많은 승병을 육성할 정도로 절의 규모가 컸다고 한다. 왜적은 공주를 초토화하고 북상하여 비암사 승병과 전투를 벌였는데 조총과 군사 숫자에 눌려 비암사 승병이 지고 말았다. 비암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왜적들은 비암사의 승병을 살해하고 닥치는 대로 전각에 불을 놓았다. 당시 비암사 주변에서는 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많았는데 왜군은 도공을 모두 붙잡아 갔으며, 그후 비암사 주변의 도자기 생산도 중단되었다고 한다. 다른 지역의 피란민은 모두 잡혀 변을 당하였지만 산 너머 송암 부락 골짜기에 숨은 사람들은 무사하였다. 그래서 용암리 지명을 생천(生天, 生千)이라 불렀다. 살아남은 일천명(一千名)의 사람들과 그곳에 정착한 사람들이 인근 마을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용암리에 정착한 사람들이 ‘우리가 이대로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당하지 말고 평소에 힘을 기르자’며 시작한 것이 강다리라고도 한다.

유래에 상응하는 역사의 흔적과 일화도 분명 확인이 가능하여야 한다. 지역의 임진왜란 흔적도 찾아보고 백제부흥운동과의 연계성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강(强)을 힘으로 보고 다리는 ‘기른다’로 해석하여 ‘힘을 기르자’라는 뜻으로 쓰였다는 내용의 증언 채록이 헛되지 않았으면 한다.

구연자가 어렸을 때부터 마을 어른들이 자주 말하여 준 이야기라고 하였다. 용암강다리는 용암 주변 마을에서 행한 옛 놀이리지만 이제는 모두 사라지고 용암리만 맥을 이어 가고 있다.

특히 세종과 공주 지역 일대에서 행하는 줄다리기를 지칭하는 것이 강다리이다. 오래 전에는 공주군 의당면과 공주시[옛 미나리 깡] 일대와 그 밖의 서너 군데에서 강다리를 하여 왔다. 지금은 강다리란 말도 사라지고 행위가 많이 변형되어 그저 줄다리기라 하면서 체육대회나 문화행사에 민속놀이란 제목으로 행하고 있으며, 강다리의 순수 목적이 많이 변형되어 단순한 승부에 집착하고 있다.

목신제를 지낼 때 제물은 떡시루에다 쌀을 넣은 그릇을 넣고 가운데에 촛대를 꽂는다. 떡시루 앞에 돼지머리를 삶지 않고 생으로 놓는다. 예전에는 쇠머리를 쓸 때도 있었다고 한다. 돼지머리 옆에는 마른 명태를 놓고, 앞에 대추·밤·곶감·배·사과 순서로 놓는다. 또 앞에 향합(香盒)[제사 때 피우는 향을 담는 합]과 양쪽에 촛대를 놓고 가운데에 술병을 놓는다. 목신제 제물은 여자가 준비를 돕지만 나무 아래까지는 오지 않는다.

새로운 문제는 소지·성별과 관련된 무속적 형식, 진설물의 현대적 해석이다. 농경사회의 주술적 신앙을 현대에 어떻게 재해석하느냐는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강다리의 지속적인 전승에 영향과 한계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강다리는 용암리 마을 행사로 진행되어 왔지만 이제는 세종특별자치시를 대표하는 민속행사이다. 그래서 가장 시급한 것은 보전 문제이다. 어떻게 보전하고 지속 가능한 형태로 발전시킬 것인가는 마을 주민들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여러 가지 방안이 있겠지만 보전회의 필요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보전회가 재정적인 압박을 극복하여 시연을 유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강다리는 수신제(水神祭)와 목신제(木神祭)를 함께 지내기 때문에 주민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한자리에 모여 탁주도 마시고 음식도 나누어 먹어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든다. 한때는 집집마다 강짚을 준비하고 지신밟기를 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비용을 분담하였으며, 자금이 풍부하면 마을 숙원사업을 할 수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강다리기 시연기록의 수집 정리 필요성을 강조하여 본다.

지난 1998년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충청남도 대표로 용암의 강다리가 출전하였다. 무더운 여름 내내, 또 농번기에 농사일을 제쳐 놓고 민속대회에 출전한 것은 세종특별자치시 민속의 중요성과 특히 강다리가 흔한 민속놀이가 아님을 보여 준 것이라 본다. 강다리를 전승하기 위하여 ‘세종특별자치시 무형문화재 2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이제는 어엿한 세종 축제의 핵심 행사로 자리매김하였다. 모든 기록의 세세한 축적이 필요한 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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