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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평리나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257
한자 大平里-
영어공식명칭 Daepyeongrinaru
이칭/별칭 대평나루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시대 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강창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비정 지역 금남교 - 세종특별자치시 대평동 지도보기
성격 나루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대평동나성동을 이어 주던 금강의 나루.

[명칭 유래]

대평리에 있는 나루라는 데서 명칭이 유래하였다.

[형성 및 변천]

대평리나루금강 건너편 나성리(羅城里)에는 나성나루가 있었다. 나성나루[羅里津]는 나리포(羅里鋪)가 있던 곳이다. 본래 나리포는 1720년경 진휼청에서 흉년에 대비하여 공주와 연기의 접경 지역에 설치한 창고였다. 선박으로 인근 지방의 곡물을 매입하여 보관하던 창고였지만, 중앙 조정에서 세금 징수를 위한 포구를 개설한 것이다. 나성리금강으로 좁게 튀어나온 지형으로 백제시대 토성이 자리하고 있으며, 토성 위에는 조선시대 부안임씨 가문에서 운영하던 독락정(獨樂亭)이 자리 잡고 있다. 금강 상류의 포구였던 나리포가 전라도 임피현[군산 지역의 옛 지명]으로 옮겨진 이후 나리진은 금강을 건너는 나루가 되었다. 나리진은 금강 뱃길과 육로가 교차하는 요충지였다.

일제의 침략 의도가 노골화되었던 1908년 나리포의 맞은편 대평리 금강변에 일본인들이 포구와 장시[정기 시장]를 개설하였으며, 대평리나루의 장시는 부강장과 견줄 정도의 규모로 번성하였다. 대평나루가 있던 곳은 대부분 지형이 낮고 평평하여 농경지와 취락이 발달하였지만, 매년 장마로 강물이 범람하는 피해를 보기도 하였다. 대평나루대평장이 신설된 후 일본인에 의해 간척사업이 추진되었다. 지금까지도 주민들에게 많이 회자되는 장남평야의 간척이다. 1927년 11월 30일에 ‘장남수리조합’이 설립되었고, 두 번에 걸쳐 홍수 피해를 보았으며 1936년에 금강 제방 공사를 완료하였다. 1946년 6월에는 많은 양의 비가 내려 금강 제방의 위험 수위까지 강물이 불어났다. 사람들은 금강 제방을 통해 피신하였으나 제방이 무너져 동네 306호가 모두 유실되었고 대평들은 삽시간에 물바다가 되는 큰 피해를 보았다.

[현황]

일제강점기에 지역 성장을 이끌었던 대평나루대평장, 장남평야, 나성뜰과 나성나루는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지역에 포함되면서 옛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현재 나성동[옛 남면 나성리]과 대평동[옛 금남면 대평리]을 잇는 금남교가 건설되어 있고, 나성동 금강변 절벽에는 조선 초기 정자인 독락정이 자리하고 있으며 일대는 독락정역사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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