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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강포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263
한자 芙江浦口
영어공식명칭 Bugang-pogu
이칭/별칭 부강포,부강나루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시대 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강창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비정 지역 부강포구 -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부강리 지도보기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부강리에 있던 포구.

[명칭 유래]

부강포구는 부용강(芙蓉江)과 부강(芙江)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형성 및 변천]

세종특별자치시를 동서로 흐르는 금강은 비교적 수심이 깊고 수량도 풍부하여 돛단배가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부강은 금강 내륙수로의 가항(可航)[운항이 가능한] 종점으로 내륙지방과 돛단배 왕래가 잦은 전국 8대 포구 가운데 하나였다. 금강 중류에 위치하였던 부강포구는 충청도 내륙지방의 관문 역할을 하였으며, 대전과 청주 등 내륙도시의 근대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860년대까지 부강포구는 일종의 하중도(河中島)[하천의 중간에 유속이 느려지거나 흐르는 방향이 바뀌면서 퇴적물아 쌓여 형성되는 섬]인 ‘딴만들’에 하천 항구가 자리하였다. ‘딴만들’은 부강 장시가 처음 열렸던 곳이다. 그러나 딴만들은 토사 퇴적과 잦은 범람(汎濫)[큰 물이 흘러넘침]으로 오래 유지될 수 없게 되어 금강 본류와 작은 하천인 백천(白川)이 합류하는 구들기 마을 앞의 ‘구들기 나루터’로 옮기게 되었다. 구들기는 지형상 뒤에는 산성이 있고 앞에는 금강을 내려다 볼 수 있어 취락(聚落)[인간의 생활 근거지인 가옥의 집합체] 입지에도 적절하였다. 그러나 구들기도 사행 곡류의 흐름[곡류 운동]이 복잡하였고, 1900년경 큰 홍수로 구들기마저 토사로 메워졌다. 1946년 대홍수로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자 현재의 시장[부강전통시장]으로 옮기게 되었다. 부강 주민들은 아직도 구들기 나루터 근처에 있었던 시장을 ‘구장터’라 부른다.

구들기로 이동한 부강포구는 금강수로 하항(河港)[하천에 있는 항구]의 번성기를 맞게 되었다. 당시 부강포구에는 열촌(列村)[집이 줄지어 서 있는 모양으로 모여 있는 마을] 형태의 하항 취락이 발달하였고, 1905년 경부선 철도 개통 전까지 거주지 및 이동 상인들의 숙박시설과 주막 등 시장 취락이 번성하는 전성기를 누렸다. 부강역이 지어지면서 부강포구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고, 부강장에 들어온 쌀 또한 뱃길을 통하여 강경포구로 운반되지 않고 철도를 이용하여 직접 개항장으로 옮겨졌다. 호남선 철도 개통으로 가항(可航) 하천의 종점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

번성기 때 부강포구에서 거래된 상품으로는 해산물은 명태·대구·청어 등과 소금 및 새우젓이었고 내륙에서는 무명·삼베·소·말·임산물(林産物)[산림에서 나는 물품] 등이 들어와 중계 교역품으로 거래되었다. 서해 군산항에서 금강까지는 2~5일이 소요되었고, 장시[정기 시장]가 개시될 때에는 200여 척의 돛단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부강포구에서 당시의 생활필수품인 소금은 등짐장수들이 부강포구에서 청주를 거쳐 진천·증평·음성 방면으로, 문의·회덕을 거쳐 보은·옥천방면으로, 문의를 거쳐 청안·괴산 방면으로 공급하는 넓은 상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충청 내륙지방에 해산물을 공급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현황]

부강포구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도로 교통이 발달하면서 급격히 쇠락(衰落)하였다. 현재 부강중학교 남쪽 들판이 옛 부강포구[현재 한화 L&C 공장, 구들기 마을 일대]가 있었던 곳이다. 현재 부강면부강중학교 등의 지명으로만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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