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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369
한자 三一運動
영어공식명칭 The March First Declaration of Independence
이칭/별칭 기미독립만세운동,기미독립운동,삼일만세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창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03월 13일연표보기 - 전의시장에서 130명이 만세 시위
종결 시기/일시 1919년 04월 21일연표보기 - 유천리에서 주민 1명이 단독 만세 시위
발단 시기/일시 1919년 03월 06일연표보기 - 신정리 농민 이수욱이 광무황제 국장에 참례하고 귀향하여 동지들을 규합
전개 시기/일시 1919년 03월 15일연표보기 - 주민 수백명이 전동면소재지 일대에서 만세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19년 03월 23일연표보기 - 서면에서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23~26일 - 북면, 서면, 남면의 10여 개 마을에서 횃불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19년 03월 26일연표보기 - 동면 응암리 주민들이 고목골 뒷산에서 밤에 횃불을 올리고 대한독립만세 외침
전개 시기/일시 1919년 03월 27일연표보기 - 동면 내 6곳에서 횃불을 올리고 대한독립만세 외침
전개 시기/일시 1919년 03월 28일연표보기 - 군수가 민심을 무마하려고 동면사무소에서 순회 강연을 하자 송용리 청년 장홍진이 이를 반박하고 마을 주민들을 설득하여 10여 명과 뒷산에서 횃불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19년 03월 29일연표보기 - 청송리 주민 약 20명이 동림산에 올라가 횃불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19년 03월 30일연표보기 - 석곡리 주민들이 국사봉에서 횃불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19년 03월 30일연표보기 - 조치원 시장에서 청주군 강내·강외면 주민 횃불시위에 호응하여 홍일섭 주도로 250명이 만세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19년 03월 30일연표보기 - 서면 내 거의 모든 마을에서 횃불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19년 03월 31일연표보기 - 강내·강외면 주민들 밤에도 산 위에 올라가 횃불 시위를 하고 헌병보조원 집에 불을 지름
전개 시기/일시 1919년 03월 31일 - 신대리 주민 250명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19년 03월 31일 - 남면의 각 마을에서 횃불을 올리고 만세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19년 04월 01일 - 와촌리 주민 약 130명이 독립만세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19년 04월 01일 - 송담리 주민 약 30명이 3월 31일에 이어 서운산에 올라 횃불을 놓고 대한독립만세 외침
전개 시기/일시 1919년 04월 03일연표보기 - 연기리 시장에서 400~500명의 군중이 만세 시위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1일 밤 9시경~2일 오전 2시 - 장군면 도계리 주민 100여 명이 풍덕골 마을 뒷산에 올라가 태극기를 세우고 횃불을 지피며 대한독립만세 외침
전개 시기/일시 1919년 04월 20일연표보기 - 연기면 연기리에서 수백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04월 01일연표보기 - 봉대리 주민들이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에 참여
성격 사회운동
관련 인물/단체 권혁기|이수욱|장홍진

[정의]

1919년 3월과 4월 세종 지역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 운동.

[경과]

전의면에서는 1919년 3월 13일부터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신정리 농민 이수욱이 광무황제 국장에 참례하고 3월 6일 귀향하여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3월 13일 전의시장에서 130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참여한 23명이 일경에 잡혀 갔다. 4월 21일 유천리(柳川里)에서 주민 1명이 단독 만세시위를 벌였다. 전동면에서는 3월 15일 주민 수백명이 면소재지 일대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고, 3월 29일에는 청송리에서 주민 약 20명이 동림산[주민들은 내동산(內洞山)이라고 함]에 올라가 횃불 시위를 하였다. 주동자 권혁기(權赫基)[이명 明瑞, 1889~1933]는 같은 해 2월 1일 붙잡혀 들어가 6개월을 복역하였다. 3월 30일 석곡리 주민들이 국사봉에서 횃불시위를 벌였고, 4월 1일 봉대리 주민들이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북면[현 조치원읍], 서면[현 연서면], 남면[현 연기면정부종합청사 지역]의 10여 개 마을에서는 3월 23일부터 26일까지 대대적인 횃불시위를 벌였다. 3월 30일 조치원 시장에서는 청주군 강내·강외면[현 오송읍] 주민들의 횃불시위에 호응하여 홍일섭의 주도로 250명이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23명이 검거되었다. 3월 31일 밤에도 산 위에 올라가 횃불시위를 하고 헌병보조원의 집에 불을 질렀다.

1919년 3월 26일 동면[현 연동면] 응암리 주민들이 청주군 강내면 사곡리 주민들의 권고로 고목골 뒷산에서 밤에 횃불을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3월 27일 면내 6곳에서 횃불을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3월 28일 군수가 민심을 무마하려고 면사무소에서 순회 강연을 하자 송용리 청년 장홍진은 이를 반박하고 마을 주민들을 설득하여 10여 명과 뒷산에서 횃불 시위를 벌였다.

1919년 3월 23일 서면[현 연서면]에서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고, 3월 30일에는 면내 거의 모든 마을에서 횃불시위를 전개하였다. 내창리(內倉里)[현 서창리]에서는 500여 명의 군중이 시위하였고, 5명이 체포되었다. 3월 31일에는 신대리(新垈里) 주민 250명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하였다. 4월 1일에는 와촌리(瓦村里) 주민 약 130명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1919년 3월 31일 남면[현 연기면정부종합청사 지역]의 각 마을에서 횃불을 올리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양화리 주민 500명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하다 8명이 체포되었다. 방축리 주민 약 30명은 밤에 황우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리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양화리·진의리·송담리에서도 주민들이 횃불시위를 전개하였고 4월 1일에도 계속 횃불 시위를 하였다. 송담리 주민 약 30명이 서운산에 올라 횃불을 놓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갈운리 주민 약 50명도 황우산에 올라가 횃불시위를 하였으며. 4월 3일 연기리 시장에서 400~500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4월 20일 연기면 연기리에서 수백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며, 날짜는 미상이지만 월산리 주민들도 횃불시위를 하였다. 1919년 장군면 도계리 주민 100여 명이 4월 1일 밤 9시경부터 이튿날 오전 2시까지 풍덕골 마을 뒷산에 올라가 태극기를 세우고 횃불을 지피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공주경찰서 경찰과 수비대 보병이 출동하여 총검으로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동 인사들을 체포하였다.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운당1리 주민들은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체포되어 매를 맞고 귀가하여 병으로 사망한 이도 있었다. 소정3리에서도 주민 몇명이 매봉재에 올라가 횃불을 올리고 시위하였다고 한다. 각 지역에서 횃불을 올리며 만세시위를 벌인 것은 세종 지역 3·1 운동의 특징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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