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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재건학교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389
한자 金南再建學校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학교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경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교 시기/일시 1963년 8월연표보기 - 금남재건학교 설립
폐교 시기/일시 1969년 말연표보기 - 금남재건학교 폐교
성격 야간학교
설립자 강정현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용포리에 있었던 사립 교육 기관.

[설립배경]

1960년대 초는 전국적으로 재건국민운동이 시작된 시기이다. 당시 농촌은 매우 곤궁하였으며, 농촌에 거주하던 청소년 대부분은 의무교육인 초등학교만을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당시 27세의 강정현은 1961년 충남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영어교사자격증을 취득하여 영어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강정현은 충청남도 영어교사자격시험에 합격하였지만 대기발령 중 제도의 잘못으로 합격이 무효가 되었다. 마침 1963년 용포리 이장을 맡게 된 강정현은 금남면 재건국민운동 청년담당부 회장으로 선임되어 마을마다 찾아다니며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8월부터 금남면 재건운동 간사를 맡아 활동하게 되었다.

당시 재건국민운동의 교육사업 일환으로 전국적으로 재건학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연기군에서도 몇 군데 재건학교가 설립되었지만 금남재건학교가 가장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변천]

금남재건학교는 1963년 강정현이 재건국민운동청년담당 회장직을 맡아 30여 명의 학생을 야간에 가르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금남면 용담리, 두만리금남면과 인접한 공주군 반포면 송곡리와 대덕군 탄동면의 마을에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만을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용담리 침례교회에서 교육을 받았다. 교육 여건상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아 1964년 8월부터 1966년 가을까지 금남면 용포리의 대평감리교회 이장섭 목사의 협조를 받아 대평감리교회에서 수업을 하였다.

강정현의 아버지 강기봉과 사촌 강일현이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강기봉 소유의 대지 350평[옛 조치원성당 금남공소 자리, 용포리 141-1]에 교실을 신축하게 되었다. 교실에 필요한 물품들은 영대초등학교를 허무는 과정에서 자재를 인수하여 사용하였다. 이후 금남면의 사립학교 건립을 위해 군 사령부에 여러차례 문을 두드렸으나 여건이 맞지 않아 염원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강정현은 1969년 말 금남면 이동조합이 합치면서 금남농협 참사를 맡아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에 재건학교를 운영할 수 없게 되었으나 마땅히 후임자를 찾을 수 없어 폐교에 이르게 되었다.

[교육 활동]

교육은 1, 2, 3학년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낮에는 홀치기, 가발 제조, 스웨터짜기, 솔, 수놓기 등 부업을 하고 밤에 공부를 하였다. 교사진은 강기세, 임상전, 오광진, 강광현, 황원주, 정청묵과 초등학교 현직교사 몇 명의 협조로 구성되었다. 재건학교는 국가에서 지원을 받거나 학생들로부터 수업료를 받지 않고 강기봉의 도움으로 책을 구입하였으며, 난로 설치 등 난방 일체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학생들은 봄에는 모내기, 가을에는 무뽑기 등 농촌일손돕기에 나서기도 하였다. 형편이 나아지면 금호중학교나 성남중학교에 진학하기도 하였다.

[현황]

금남재건학교는 인접한 연기군 남면, 천안, 아산 등지에서도 학생들이 모여 총 배출한 학생수가 280여 명이다. 향학열에 불타는 청소년들에게 배움과 자립의 터전이던 학교가 폐교된 이후 건물과 땅을 희사하여 조치원성당 금남공소로 사용되었다. 현재 학교로 사용하던 건물은 성당이 대평동으로 이전하면서 개인 소유로 전환되었다.

[참고문헌]
  • 『금남면향토지』 (금남향토지발간위원회·조치원문화원, 1997)
  • 인터뷰(재건학교 당시 교사, 2019.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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