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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440
한자 燕岐斥和碑
이칭/별칭 척화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교촌3길 13[연기리 34]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정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71년(고종 8)연표보기 - 연기 척화비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2016년 2월 11일연표보기 - 연기 척화비 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제11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연기 척화비 세종특별자치시 기념 재지정
현 소재지 연기 척화비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교촌3길 13[연기리 34]지도보기
성격
관련 인물 흥선대원군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120㎝[높이]|43㎝[너비]|16.5㎝[두께]
소유자 세종향교재단
관리자 연기향교
문화재 지정 번호 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연기리에 있는 개항기 흥선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

[개설]

척화비는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를 겪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쇄국의 결의를 굳히고 온 국민에게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하여 1866년 비문을 짓고 1871년 4월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의 각처에 세운 비이다.

그러나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되고 개국을 하게 되자 많은 수의 척화비가 철거되거나 파묻혔다.

현재 전국적으로 30여 개의 척화비가 확인되고 있으며, 19개의 비가 문화재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건립 경위]

흥선대원군은 제국주의의 침략을 배격하고 쇄국을 강화하기 위한 굳은 결의를 나타내고 백성들에게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기 위하여 1871년(고종 8) 4월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의 각처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위치]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연기리에 있는 연기향교 내 척화비가 세워져 있다.

[형태]

척화비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상단을 둥글게 마무리된 방부원수(方趺圓首) 호패 모양으로 비신받침을 갖추고 있으나 땅속에 묻혀 있어 확인되지 않는다. 비의 크기는 높이 120㎝, 너비 43㎝, 두께 16.5㎝이다.

[금석문]

척화비는 앞면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는 파는 것(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이라고 큰 글씨로 새겼다.

옆에는 ‘우리들의 만대 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운다(戒我萬年子孫 丙寅作辛未立)’라는 작은 글씨가 적혀 있다.

[현황]

연기 척화비연기향교 명륜당 서편 담장에 다른 비석들과 함께 위치하고 있다. 척화비는 화강석으로, 대체로 온전한 편이나 비석 상단부 오른쪽이 훼손된 상태이다. 본래의 건립 장소와 연기향교로 옮겨진 시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연기 척화비는 2016년 2월 11일 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척화비는 1871년(고종 8) 전국 각지에 세워졌지만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청(淸)나라에 납치되어 가고 제국주의의 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많은 수의 척화비가 철거되거나 훼손되었지만 연기 척화비는 비교적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척화비는 조선 후기 외세 침략의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자주성을 지키려는 역사적 사실을 보여 주는 문화유산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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