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441
한자 雲住山城
영어공식명칭 Unjusanseong
이칭/별칭 고산산성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청송리지도보기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백영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건립 시기/일시 백제 또는 통일신라시대~조선시대 - 백제부흥운동을 펼친 주류성으로 비정됨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7년 - 문지·건물지 및 성벽 축조 방법 확인
성격 산성
크기(높이,길이,둘레) 외성 둘레 3,098m|내성 둘레 543m
소유자 국유
관리자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 지정 번호 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제1호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청송리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

[개설]

운주산성전동면에 있는 산성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성에 오르면 주변의 전망이 매우 좋다. 동쪽으로 충청북도 청주시가 한눈에 들어오고 남쪽으로는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미호천 주변의 넓은 충적평야, 서쪽은 전의읍내와 전동면 일대, 북쪽으로는 충청남도 천안의 남쪽 일대가 조망된다. 운주산(雲住山)[459.9m]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전의현 산천조(山川條)에는 “운주산은 현 남쪽으로 7리에 있다. 증산고산으로 높이 자리한다(雲住山 在縣南七里 與甑山高山鼎峙)”라고 되어 있고, 고적조(古蹟條)에는 “금이성운주산에 있다. 석축이고 주위 1,528척 안에 우물 1개가 있고 지금은 폐되었다(金伊城 在雲住山 石築 周一千五百二十八尺 內有一井 今廢)”라고 하여 운주산에 있는 산성이 금이성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운주산이 동쪽 10리 되는 곳에 있다(雲住山 東十里 與甑山高山鼎峙)”라고 하여 위치를 서로 다르게 말하고 있다. 즉 운주산이 남쪽에도 있고 동쪽에도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적조(古蹟條)를 보면 “고산산성은 석축에 주위 5,132척 내에 우물 1개소가 있고 지금은 폐되었다(高山山城 石築 周五千一百三十二尺 內有一井 今廢)”라고 되어 있고 『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고산산성은 동쪽 8리에 있다. 주위 5,132척 우물은 3개소이다(高山山城 東八里 周五千一百三十二尺 井三)” 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운주산은 원래 고산(高山)으로 불린 것을 알 수 있으며, 운주산성 역시 고산산성(高山山城)으로 불린 것을 알 수 있다.

[위치]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청송리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형태]

운주산성은 459m 운주산 정상부에 내성과 외성이 결합된 이중 구조를 하고 있다. 즉 바깥쪽에 세 개의 산봉(山峰)을 에워싸면서 축조된 포곡식산성이 있고, 그 안에 다시 테뫼식의 소규모 산성이 이중으로 돌려져 있다. 외곽성의 규모는 3,098m이고, 내성은 543m다. 지형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으며,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아 전체적으로 북동고 서남저 지형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남사면과 서사면에는 건물지로 보이는 평탄면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자리하고 있다.

성벽은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편축식으로 축조하였다. 협축 형태로 되어 있는 구간도 있다. 대부분이 완전히 붕괴된 상태지만 일부는 남아 있는 구간도 있으며, 장방형으로 다듬은 성돌을 이용하여 수평쌓기 형태로 축조되어 있다. 성문은 사방에서 모두 5개소가 확인되었다. 모두 평문식인 것이 특징이다. 그 가운데 동문지와 서문지는 최근 발굴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구조와 규모를 바탕으로 복원되었다. 우물터는 원래 성내에 3개소가 있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2개소만 확인되었다. 성내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수습되어 매우 오랜 기간 기능을 한 산성임을 알 수 있다.

[현황]

성벽의 축조방법은 성벽을 쌓기 위한 기초부는 생토층을 정지한 후 그 위에 회색 점질토와 ‘회색 점질토+작은 할석’을 3m 폭으로 깊이 1.8m 정도 단단하게 다져 넣어 다짐토로 이용하였다. 성벽의 벽면 구축에 사용된 석재는 기단토 위에 형태가 고르지 못한 대형의 석재를 놓고, 2단부터는 장방형 또는 방형으로 가공된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2단은 안으로 20~30㎝ 들여쌓기를 하였다. 성벽의 성돌은 옆으로 눕혀서 쌓아올렸다. 성돌은 아래 위로 경계선이 평행선을 이루고 있으며 돌과 돌 사이 틈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바른층쌓기를 하였다.

[의의와 평가]

운주산성은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부흥운동을 펼친 주류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 토기 조각이 소량 출토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통일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건물지 및 유물이 확인되어 백제의 산성인지가 불명확해졌다. 향후 운주산성에 대한 연차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이러한 과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