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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강 보만정 및 검담서원 묘정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455
한자 芙江保晩亭-黔潭書院廟庭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역사/근현대,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금호선말길 15-18[금호리 712-3]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고수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69년(현종 10)연표보기 - 보만정 건립
건립 시기/일시 1694년(숙종 20)연표보기 - 검담서원 건립
건립 시기/일시 1766년(영조 42)연표보기 - 검담서원 묘정비 건립
훼철|철거 시기/일시 1871년(고종 8)연표보기 - 검담서원 철폐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0년대 초 - 보만정 건물 재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1969년 - 보만정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88년 - 보만정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2000년 - 보만정 중수
문화재 지정 일시 2002년 1월 11일연표보기 -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31호로 지정
문화재 해지 일시 2012년 7월 1일연표보기 - 부강 보만정 및 검담서원 묘정비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31호 지정 해지
문화재 지정 일시 2012년 12월 31일연표보기 -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부강 보만정 및 검담서원 묘정비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재지정
현 소재지 부강 보만정 및 검담서원 묘정비 -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금호선말길 15-18[금호리 712-3]지도보기
원소재지 부강 보만정 및 검담서원 묘정비 -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 금호리 712-3
성격 정자|비석
정면 칸수 3칸
측면 칸수 2칸
소유자 국유
관리자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 지정 번호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금호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정자와 서원의 건립 내력 및 연원을 적은 비석.

[개설]

보만정(保晩亭)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1606~1672]이 강학 공간으로 이용한 정자이다. 이 자리에는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검담서원(黔潭書院)이 있었다.

보만정은 1682년(숙종 9) 왕명에 따라 간행한 『동춘당집』의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보만(保晩)’은 늙어 가면서도 자기의 행실을 깨끗이 지켜 나가고 옳은 길로 나가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송준길은 검담의 경치를 좋아하여 한가로이 만년을 보낼 곳으로, 또 사후의 장지(葬地)[죽을 사람을 묻는 땅]로 삼고 싶은 곳으로 검담을 택한 것으로 알려진다.

송준길은 보만정을 지은 이듬해인 1670년에 조복양(趙復陽)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만정의 승경(勝景)[뛰어난 경치]에 대하여 “큰 강이 뜰 아래로 흐르는데 세 개의 절벽이 서로 마주보고 서 있어 시야는 수십 리이고 물이 굽이쳐 싸고 흐르며, 토정 이지함이 소금을 팔려고 장막을 펼쳤던 곳이자 ‘삼남제일강산(三南第一江山)’이라고 칭찬했던 곳”이라 하였다.

‘검담(黔潭)’이란 지명은 마을 앞 금강에 있는 ‘검소(黔沼)’라는 소(沼)의 명칭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검담서원의 묘정비는 후학들이 송준길의 학문과 덕을 기리기 위하여 1766년(영조 24)에 세운 것이다.

[위치]

부강 보만정 및 검담서원 묘정비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금호리에 있다.

[변천]

보만정은 원래 1669년(현종 10) 동춘당 송준길이 학문을 연구하려고 검담에 세운 정자이다. 정자 건축은 노년의 송준길을 대신해서 손자가 맡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보만정을 지은 지 3년 후인 1672년(현종 13) 송준길이 동춘당에서 67세의 나이로 별세(別世)하였다. 이후 후손과 문의 지역 사족들이 함께 보만정을 수호하다가 1694년(숙종 20) 송준길을 기리기 위하여 검담서원(黔潭書院)을 세웠다.

원래 송준길은 규암 송인수 등과 함께 노봉서원(魯峯書院)에 제향되어 있었으나 이 해에 연기, 문의, 청주, 공주, 회덕의 유림들이 송준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검담에 서원을 창건하였다. 그리고 검담이 ‘주자가 머문 무이(武夷)와 같다’하여 송준길을 이안(移安)[신주나 영정 등을 다른 곳으로 옮겨 모심], 독향(獨享)[사당이나 서원에서 한 사람만의 신주를 모셔 두고 제향하는 일]하였다고 한다.

『열읍원우사적』 충청도 문의(文義)의 검담서원 조를 보면 이듬해인 1695년에 ‘검담(黔潭)’으로 사액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때부터 보만정검담서원의 학문을 강론하는 강학공간으로 사용되었다.

1766년(영조 24)에는 보만정 뜰에 검담서원 묘정비를 세웠다. 비문은 김원행(金元行)이 짓고 송명흠(宋明欽)이 글씨를 썼다.

검담서원은 200여 년이 지난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하여 철폐되고 검담서원 묘정비만 남게 되었다.

현재의 보만정 건물은 1920년대 초 재건되었고, 1969년 충청북도에서 지원하여 보수하였는데 당시 「보만정중수기」는 11세손인 송조빈(宋朝彬)이 지었다. 이후 1988년과 2000년에도 청원군과 문중의 부담으로 보수가 이루어졌다.

2002년 1월 11일 부강 보만정검담서원 묘정비와 함께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31호로 지정되었다가 세종특별자치시 출범으로 2012년 7월 1일 해지되고 2012년 12월 31일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보만정은 조선 후기 기호지방의 대표적 별당 형식을 띤 정자 건축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홑처마이며, 처마 아래 중앙에 ‘보만정(保晩亭)’ 편액이 걸려 있다.

앞면 3칸에 측면은 중앙에 넓은 칸과 양쪽에 반 칸을 둔 2칸 규모로 되어 있다. 내부에는 방과 함께 대청마루와 툇마루가 있다. 방의 뒷면에는 서고가 있어 동춘당 문집 판각(板刻)이 보관되어 있었다.

초석은 건물의 앞과 뒤는 방형 주초석이고, 가운데 2열은 덤벙 주초석으로 되어 있다. 기둥은 민간주택에서 주로 사용하는 방주(方柱)를 사용하였다.

보만정 앞뜰에는 검담서원 묘정비가 있다. 묘정비는 대석이 높고, 비신이 크며, 가첨석(加檐石)[빗돌이나 석등 따위를 세운 다음 그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이 중후하다.

[현황]

보만정 입구에는 외삼문인 솟을대문이 있고, 좌우에 제기고가 있다. 담은 사괴석 담장으로 처리되어 있다.

담장 뒤편 작은 문 바로 앞에는 검담서원(黔潭書院) 매패소(埋牌所)가 있다.

[의의와 평가]

보만정은 동춘당 송준길이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세운 정자로, 송준길의 마지막 숨결과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보만정은 송준길을 제향한 검담서원이 세워지면서 검담서원의 강학건물로 200여 년간 사용되었으며 1871년 검담서원이 훼철되기 전까지 수많은 유림과 선비들의 강학공간으로써 유림의 회합 장소로도 쓰였다.

또한 동춘당(同春堂) 문집(文集) 판각(板刻)이 300여 년간 보관된 곳으로서의 의의가 있고, 보만정 앞의 묘정비는 검담서원의 내력 및 동춘당 송준길의 일생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있다.

보만정은 건축적으로도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로 접어드는 과정에서 건축 양식 변화의 특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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