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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458
한자 翰林亭
영어공식명칭 Hanrimjeong
분야 역사/근현대,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곡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고수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64년연표보기 - 한림정 건립
현 소재지 한림정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곡리 5 지도보기
원소재지 한림정 - 충청남도 연기군 금남면 영곡리 5
성격 정자
양식 팔작지붕
정면 칸수 3칸
측면 칸수 3칸
소유자 평산신씨 종중
관리자 평산신씨 종중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곡리에 있는 현대 정자.

[개설]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곡리에 위치한 한림정(翰林亭)은 조광조(趙光祖)의 제자로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은거(隱居)[세상을 피해서 숨어 삶]한 신준미(申遵美)[1491~1562]와 관련된 유서 깊은 유적이다.

신준미의 본관은 평산이고, 호는 초려(草廬)이다. 아버지는 별제를 지낸 신원(申援)이다.

신준미는 1519년(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3등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인 조광조가 사사(賜死)[죽일 죄인을 대우하여 임금이 독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하던 일]되고 현량과 급제가 취소되자 벼슬을 버리고 공주 금강가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1545년(인종 1) 6월 조광조의 작위가 추복(追復)[빼앗은 위호(位號)를 그 사람이 죽은 뒤에 회복시켜 줌]되면서 현량과 급제자들의 자격 또한 복구되고 급제자들을 등용하는 시책이 실시되면서 신준미는 봉상시 주부, 성균관 전적 등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명종조에 계속된 외척들 간 대립으로 인하여 다시 과거 급제가 취소되었고, 1568년(선조 1)에 이르러 사림파(士林派)[조선 초기에 산림에 묻혀 유학 연구에 힘쓰던 문인들의 한 파]의 득세로 완전히 회복되었다.

신준미의 묘소와 재실(齋室)[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이 금남면 영곡리에 있다. 신준미의 행적과 관련된 유적으로 병암서사(屛岩書社) 터도 인접하여 있으며, 관련 설화도 전하여진다.

[위치]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곡리에 있다.

[변천]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로 은거한 신준미가 정자를 지으려고 터를 닦을 때 마침 그 앞을 지나던 젊은이가 말에서 떨어져 죽자 정자 짓는 것을 중단하고 후세로 미뤘다고 한다.

현재의 한림정은 1964년에 평산신씨 문중에서 힘을 모아 신준미가 터를 닦은 자리에 정자를 지은 것이다.

[형태]

한림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설화]

이 마을에 전해지는 특이한 설화가 있다.

효성이 지극한 소년이 아버지가 병으로 앓아 눕자 낙심하여 수심에 잠겨 있었는데 길손이 아버지의 병을 고쳐 주겠다며 돈을 달라고 하였다 한다.

소년은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계곡에서 가재를 잡아다 팔고 나무를 해다 팔아 집으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나무에 걸려 있는 황금빛 딸기를 따게 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아버지께 먹이자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 후 소년은 장성해서 과거에 급제하여 큰 벼슬자리에 올라 지내다가 기묘사화 때 낙향하여 이곳에서 살았는데 그가 바로 조선시대 학자로 유명한 신준미로, 신준미한림정의 건립을 추진한 인물이다.

[현황]

한림정 주변의 유적으로는 인접한 금남면 영곡리 한양골 588에 병암서사 터가 있다.

병암서사는 18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신준미·신점(申點)[1530~1601], 임정(林頲)[1554~1636] 등 3인을 제향하였으며, 임정이 1805년(순조 5)에 사림의 공의로 추향되었다고 한다.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으며, 병암서사 터는 현재의 평산신씨 재실 자리였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조선조 기묘사화기 한림학사 신준미가 낙향해서 은거한 유서와 그가 지으려던 정자 터에 후손 평산신씨들에 의하여 유서를 기리고자 1964년 평산신씨들의 발의로 재건된 정자이다.

인접하여 관련 유적으로 신준미의 묘소와 신도비, 병암서사와 평산신씨 재실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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