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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지도』 「전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491
한자 朝鮮地圖全義
분야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경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작성 시기/일시 1750~1768년 - 『조선지도』「전의」 제작 추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08년 12월 22일 - 보물 제1587호 지정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성격 지도
용도 비변사에서 이용
문화재 지정 번호 보물[『조선지도』]

[정의]

조선 후기 7개 도의 군현을 방안식으로 그린 전국지도책에 수록된 전의현 일대 지도.

[개설]

『조선지도』는 조선시대 군국기무를 관장한 비변사에서 사용하던 전국 군현 지도책으로 전국의 모든 고을 지도가 동일한 축척과 표현 양식으로 그려졌다. 산지는 ∧표시를 중첩하여 그리고, 그 위에 청록색으로 채색하여 완성도를 높였다. 하천은 겹선으로 표현되었으며, 규모에 따라 폭을 달리하면서 본류와 지류를 구분하였다. 바다는 하천과 동일하게 연한 청색으로 묘사되었다.

지도에 표현된 고을의 크기는 실제 면적 비율을 보여 주고 있다. 또 지리 정보가 체계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인문 정보의 경우 같은 정보는 같은 기호로 표시하는 범례도 사용하였다. 즉 고을의 읍치와 감영·병영·수영·찰방역, 군사시설인 진보(鎭堡)[조선시대 때 변경이나 군사 요충지에 설치한 진영과 보루]·봉수, 세곡을 저장한 창고, 성곽 등은 전국 공통으로 표시하였다. 읍치의 위치는 적색의 원으로 표시하였으며, 읍치를 중심으로 이웃 고을과 연결되는 주 도로망이 적색 실선으로 그려져 있다. 감영·병영·수영 등은 겹선의 사각형으로 표현하였고, 일부 감영의 경우 청색으로 칠하고 여장(女墻)[성벽 위에서 방어와 공격을 유리하게 하기 위하여 낮게 쌓은 담] 표현도 하였다. 진보는 ‘◇’, 찰방역은 읍치보다 작은 적색 원으로 각각 표현하였다. 창고는 건물 모양, 봉수는 적색의 불꽃 모습으로 각각 표시하였다. 인문 정보에서 표현 방식이 모든 고을에서 이와 같이 동일한 것은 중앙에서 일정한 원칙에 의하여 편집되고 제작되었음을 보여 준다.

『조선지도』는 2008년 12월 22일 보물 제1587호로 지정되었고,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소장중이다.

[형태]

『조선지도』 「전의」 한 면의 크기는 가로 49.8×세로 38.5㎝이다. 위치·거리·방향 등의 정보를 정확하게 하기 위하여 동일한 축척의 20리 방안(方眼)[모눈] 위에 그렸다.

[구성/내용]

『조선지도』 6책 충청도의 「전의현지도첩」에서 세종 지역은 전의면·전동면소정면대곡리·고등리에 해당되는 작은 고을이었다.

전의현의 치소는 세종시 전의면 읍내리에 있었으며, 고을의 진산(鎭山)[도읍지나 각 고을에서 도읍지 또는 고을을 진호(鎭護)하는 주산(主山)으로 정하여 제사하던 산]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북쪽 5리에 있었다.’는 월조산 주맥이 읍치에 다다른 증산(甑山)이다.

지도 왼쪽의 대서면(大西面)에 있는 하천은 아산만의 삽교호로 흘러 들어가는 곡교천의 최상류로, 금강과의 분수치에 해당하는 덕고개이다. 읍내를 흐르는 하천은 미호천의 지류인 생졸천으로, 치소(治所)[어떤 지역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 동쪽을 흘러온 대부천과 합류한다. 지도에는 일부 오류가 있다. 조천천은 고을의 동쪽으로 흘러나가 청주와의 경계선을 이루며 남쪽으로 빠져나간다. 지도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지 않고 마치 남쪽으로 직접 빠져 나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또한 운주산(雲住山)을 청주와의 경계선에 있는 것처럼 표시한 것도 정밀함의 부족한 탓이다. 실제로는 읍치와 청주 간 경계선 안쪽 지점에 운주산이 있다.

다음으로 지도 왼쪽의 ‘淸州界’라고 쓰여 있는 부분에는 청주의 월경지인 덕평면(德坪面)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조선 초기부터 폐지와 존속 여부로 논란이 많던 지역으로, 특수한 지역에 해당된다.

[의의와 평가]

『조선지도』가 『팔도군현지도』, 『여지도』 등 다른 방안식 지도와 유사한 것을 볼 때 『조선지도』가 모사·제작되면서 지리정보의 사회 보급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조선지도』가 제작된 이후 방안식 지도는 일반에게도 지역 영역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였으며, 조선 후기 대축척 지도 제작에 큰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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