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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지방지도』 「연기현지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493
한자 一八七二年地方地圖燕岐縣地圖
분야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경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작성 시기/일시 1872년(고종 9)연표보기 - 『1872년 지방지도』 「연기현지도」 작성
소장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성격 지도

[정의]

1872년 팔도감영에서 전국 군현의 모습을 회화식으로 고지도에 수록한 연기현 지도.

[개설]

『1872년 지방지도』는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국가 지도 편찬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전국 군현지도집이다.

1872년 3월부터 6월 3개월에 걸쳐 각 군현에서 자체적으로 완성된 지도가 도별로 수합되었다. 수효는 모두 461장에 이른다.

『1872년 지방지도』 제작 시 진영(鎭營)을 별도로 그린 진지도에 해방(海防)[바다로부터의 침입이나 피해 등을 미리 막아 지킴]과 관련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지도를 군사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내용이 구성된 점은 당시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고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각 지방의 정보를 수집한 것과 관련이 있다.

화포청(火砲廳)·포수청(砲手廳)·척화비(斥和碑) 등이 그려진 것은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를 겪으면서 흥선대원군이 새롭게 시행한 정책 결과물로, 변화된 사회적 상황을 상징하는 내용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형태]

『1872년 지방지도』에는 군현지도뿐만 아니라 진영지도, 산성지도, 목장지도 등 군사시설이 그려진 지도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 지도들은 비교적 큰 지면에 그려진 낱장의 채색필사본으로, 각각이 첩(帖)으로 분책된 형태이다.

지도를 펼쳤을 때 크기가 가장 작은 지도는 34.4×50㎝, 가장 큰 지도는 146.7×114㎝로 지도마다 크기가 서로 다르고 편차도 크지만 첩장(帖粧) 크기는 35×25㎝로 동일하다.

[구성/내용]

『1872년 지방지도』 「연기현지도」 에서는 연기현이 한양에서 290리, 공주감영에서 40리로 각각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제작 의도만큼 지도에 기록된 정보가 상세하고 정확하지는 않다. 이는 감영의 하달을 받은 각 군현에서 짧은 기간에 지도를 제작하면서 소장하고 있던 지도를 확대하여 전사(轉寫)하는 정도에 그쳤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지역 곳곳에 훼철(毁撤)[헐어서 치움]된 서원(書院) 및 사창(社倉)(社倉)[조선 시대에 각 고을의 환곡(還穀)을 저장하여 두던 곳집]이 표시되고 척화비(斥和碑) 등이 그려져 있다.

또 도로와 장시(場市), 점막(店幕) 등의 이름과 위치 표시가 상세한 점은 조선 후기 상업 발달로 지역 물산(物産)의 유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1872년 지방지도』 「연기현지도」 는 1872년 당시 연기현의 산천, 행정구역, 도로, 주요 건물들이 풍경화처럼 그려진 채색 회화식 지도로 1872년(고종 9)에 제작되었다. 1886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조선 왕실의 국방에 대한 위기 의식이 높아졌고, 그에 부응하여 전국적인 읍지와 지도 제작이 행하여졌다.

읍지 제작은 1891년 9월, 지도 제작은 1872년 봄에 각각 명이 내려졌다.

연기현의 특징은 다른 지역의 지도에 비하여 관아 구조가 상세히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연기현전의현 지역에 공통적으로 그려진 관아 건물은 동헌, 객사, 내아, 질청, 사창, 향청, 군기고, 내외삼문 등이다.

「연기현지도」에만 그려진 관아 건물로는 급창방, 화약고, 현사, 형청, 연병관이 있다.

읍의 중심지인 읍내면에 관아의 여러 건물과 향교가 다른 면 지역에 비하여 크게 그려져 있어 읍치(邑治)[고을의 수령이 사무를 보던 관아가 있던 곳] 중심의 이원적인 축척으로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진강과 부강이 합하여 금강으로 유입되는 강줄기와 연기현을 둘러싼 산지가 병풍처럼 그려져 있으며, 하천을 짙은 청색으로 그려 산지보다 더 부각된 느낌을 준다.

공주, 전의, 청주·문의로 통하는 도로와 그 위에 여러 점(店)[주막]들이 분포하고 있다.

고지도에 나타난 연기 지역의 역(驛)은 금사역[지금 세종특별자치시 도담동]으로, 남 7리에 있었다.

또한 읍장시(邑場市)[조선 시대에 읍에서 보통 5일마다 열리던 사설 시장]가 연기 군현 지도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며, 읍내장을 비롯하여 각지에 형성된 점(店)들이 이 시기의 상업적 면모를 짐작케 해 준다.

성산(城山)·용당산(龍塘山)·전월산(轉月山)·송현굴(松峴屈)에 기우단(祈雨壇)이 표시되어 있고, 제언(堤堰)[흐르는 물을 막아 가두기 위하여 쌓아올린 둑과 물길 따라 양쪽에 흐르는 물이 벗어나지 않도록 쌓은 제방]과 금사역의 지명이 보이며, 각 군현에 하나씩 존재한 여단·기우단·사직단 등이 나타나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읍내면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각 면이 위치하고 있고, 각 면에 소속된 동리의 이름과 호구 및 인구수가 기록되어 있다.

지도의 좌우측 상단에는 연기현의 건치연혁과 한양, 감영, 병영, 수영에서의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북이면(北二面)에 있는 봉암서원(鳳巖書院)의 훼철된 사실이 반영되어 있고, 신흥사(新興寺)·성당암(聖堂菴) 등 사찰도 폐찰이 되어 관내에는 사찰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도에 나타난 북일면, 북이면, 북삼면, 동진강 등의 지명은 사라졌다. 반면에 조치원, 전동면, 금남면, 대평리 등의 지명은 새롭게 생겨난 것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왕조에서 시행한 전국 군현지도 편찬사업의 마지막 성과물로 평가되는 『1872년 지방지도』는 이전의 관찬(官撰)[관청에서 서적을 편찬하거나 관청에서 편찬한 서적] 군현 지도집과 달리 통일성은 결여되었지만 지역 실정에 따라 비중을 둔 내용과 표현 방식도 다르게 제작되었다.

하지만 당시 지방사회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 주는 사료로서 의미가 있다. 19세기 말 변화된 정치·경제적 상황과 군사적 내용을 담고 있으며, 기존의 회화식 군현지도 제작 기법이 총체적으로 사용되어 전국 군현의 지도 제작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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