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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496
한자 世宗實錄地理志
영어공식명칭 Sejongsillokjiriji
분야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경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편찬 시기/일시 1929년 - 『세종실록지리지』 8권 8책 편찬
간행 시기/일시 1452년(문종 2) - 『세종장헌대왕실록』 163권이 편찬될 때 지리지 8권이 수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54년 - 『세종장헌대왕실록』에 부록으로 수록
소장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서울대학교
성격 지리서
권책 8권 8책

[정의]

1454년에 간행된 현 세종 지역의 옛 행정 구역 위치가 설명된 관찬 지리지.

[개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당시 수도인 경도 한성부(漢城府)와 준수도 지위에 있던 구도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를 독립적으로 다루었다. 이어 경기도[41개], 충청도[55개], 경상도[66개], 전라도[56개], 황해도[24개], 강원도[24개], 평안도[47개], 함길도[21개] 등의 334개 고을을 다루었다.

각 고을에는 지방관의 등급과 인원, 고을 연혁, 고을 별호, 속현과 속현 연혁, 진산과 명산대천, 고을 사방 경계까지의 거리, 호구[속현도 따로 기재]와 군정 수, 성씨[속현도 따로 기재], 토질과 전결(田結), 토의(土宜)[토산물], 토공(土貢)[공물], 약재, 토산, 누대, 역, 봉수, 산성, 제언(堤堰), 사찰 등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편찬/간행 경위]

조선시대 전국 지리지 편찬은 1424년(세종 6) 11월 세종이 변계량(卞季良)에게 지지(地誌)[특정 지역의 자연 및 인문 현상을 백과사전식으로 나누어 기술한 책] 편찬을 지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425년에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가 먼저 편찬되었으며, 이어서 나머지 도의 지리지가 순차적으로 완성되었다. 이를 재편집한 전국 지리지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가 1432년(세종 14)에 완성되었다.

1450년(세종 32) 세종이 승하하고 1452년(문종 2) 『세종장헌대왕실록』 163권이 편찬될 때 세종의 업적이 많아 오례의(五禮儀) 8권, 악보(樂譜) 12권, 칠정산(七政算) 8권과 함께 지리지(地理志) 8권이 수록되었다.

『신찬팔도지리지』를 기반으로 빠져 있던 1419년(세종 1)에서 1432년(세종 14)까지의 변경 내용을 첨가하고,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변화 상황을 반영하여 제148권에서 제155권까지 수록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실록에 수록되어 있던 것이기 때문에 일반 백성이 이용할 수 없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독립된 『세종실록지리지』 8권 8책이 편찬되었다.

[구성/내용]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 관할은 목(牧)이 4, 군(郡)이 11, 현령(縣令)이 1, 현감(縣監)이 39이다. 호수가 2만 4,170호(戶)이고, 인구는 10만 790명이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1,974명, 영진군(營鎭軍) 1,766명, 수호군(守護軍) 248명, 선군(船軍) 7,858명이다. 간전(墾田)은 23만 6,300결(結)이다.

1481년(성종 12)에 1차로 완성되고 여러 차례 증보하여 1530년(중종 25)에 최종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비교하여 두드러진 특징은 공물, 조세, 군역 등 국가가 징발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총정리해 놓았다는 점이다.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는 해미현(海美縣)에 두었으며, 바다 어귀까지 거리가 6리이다. 역(驛)은 감목관(監牧官)이 1명, 역승(驛丞)이 9명이다.

율봉도(栗峯道)의 관할 역은 7개다. 쌍수(雙樹), 덕류(德留), 금사(金沙), 저산(楮山), 태랑(台郞), 장양(長楊), 시화(時化)이다. 성환도(成歡道)의 관할 역은 4개이다.

금정도(金井道)의 관할 역은 11개다. 광시(光時), 세천(世川), 용곡(龍谷), 급천(汲泉), 순성(順成), 흥세(興世), 풍전(豐田), 하천(下川), 몽웅(夢熊), 해문(海門), 청연(靑淵)이다.

충청도 청주목 전의현(全義縣)은 본래 백제의 구지현(仇知縣)이었다가 고려 시기 전의현으로 고쳐 청주(淸州) 임내에 붙였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청주까지 13리, 서쪽으로 천안(天安)까지 7리, 남쪽으로 연기까지 11리, 북쪽으로 목천(木川)까지 6리이다.

호수는 166호, 인구는 572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2명, 선군이 92명이다.

충청도 청주목 연기현(燕岐縣)은 본래 백제의 두잉지현(豆仍只縣)였다. 고려 현종(顯宗) 9년 무오 때 청주 임내에 붙였다가 나중에 목천 감무(木川監務)로 연기를 겸하게 하였다. 본조 태조(太祖) 정축에 다시 두 현을 갈라서 각기 감무를 두고 태종(太宗) 갑오 때 전의(全義)에 병합하여 전기(全岐)로 고쳤다가 병신에 다시 연기 현감을 두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청주까지 15리, 서쪽으로 공주(公州)까지 11리, 남쪽으로 공주까지 5리, 북쪽으로 전의까지 18리이다.

호수는 348호, 인구 1,446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8명, 진군(鎭軍)이 10명, 선군(船軍)이 156명이다.

별도로 현의 남쪽 원수산(元帥山)에 대한 역사 기록이 있다. 충렬왕(忠烈王) 17년에 합단(哈丹) 병사가 동계(東界)에 침입하여 교주도(交州道)에 마구 들어오므로 왕이 만호(萬戶) 인후(印侯)로 하여금 중익(中翼), 한희유(韓希愈)로 좌익(左翼), 김절(金折)로 우익(右翼)을 거느리게 하여 원나라 군사와 함께 합단 적병을 맞아 연기현의 남쪽 정좌산(正左山) 아래에서 싸워 크게 이겼다.

달아나는 적을 쫓아 공주 웅진(熊津)에 이르는 동안 시체가 30여 리에 널렸고, 부녀(婦女)와 안마(鞍馬)[안장을 얹은 말]·보물들을 얻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게 되었으므로 세속에서 지금도 군사를 주둔하던 곳을 원수산이라 하여 별도의 기록을 남겼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충청도지리지」의 총론 부분에는 『세종실록지리지』에 ‘금강’이라는 지명을 사용하지만 당시에 아직 유역 전체의 지명은 아니고 공주 일대의 유로만 지칭한다. 부여의 ‘백마강’, 부강의 ‘부용강’, 연기의 ‘동진강’이 별칭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수록 방식이 다른 것은 중앙에서 전국적인 통일성을 기하기 위하여 일정한 원칙 하에 재편집한 때문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세종실록지리지』는 고을별로 일정한 항목에 따라 편찬된 전국 지리지라는 점에서 중앙집권국가를 지향한 조선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고을의 세세한 내용까지 수록된 전국 지리지의 편찬 목적은 전국 모든 고을의 조세 수취, 군역 징발 등 제반 사항을 중앙에서 직접 통제해 나가기 위한 것이어서 중앙에 바치는 조세와 군역 등의 총량만 파악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따라서 『신찬팔도지리지』에 기초하면서 일부 지역의 변화 상황을 교정·첨가하여 수록한 『세종실록지리지』의 존재는 지방관의 지위를 강화시키고 해당 고을의 지배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모든 고을에 지방관을 파견해서 다스리려 한 지방행정의 방향성과 조선 초기 전국적인 규모의 인문지리 정보를 잘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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