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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547
한자 驪興閔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임선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571년(선조 4) - 민후건 출생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652년(효종 3) - 민후건 사망
입향 시기/일시 1600년대 초반 추정 - 민후건 입향
본관 민칭도 본관 - 여흥
입향지 여흥민씨 입향지 - 연기현 월하방
세거|집성지 여흥민씨 집성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월하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민후건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월하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효자 민후건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월하리 지도보기
성씨 시조 민칭도
입향 시조 민후건

[정의]

민칭도를 시조로 하고 민후건을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세종특별자치시의 여흥민씨는 민후건이 17세기 초반에 연기현 월하방에 입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원]

여흥민씨(驪興閔氏) 시조는 고려시대에 중국에서 사신으로 왔다가 귀화한 민칭도(閔稱道)이다. 민칭도는 공자의 10제자 중 한 사람인 민손(閔損)의 후손으로, 고려 중엽에 사신으로 왔다가 귀화하여 여흥(驪興)에 정착하여 여흥민씨의 시조가 되었다.

고려 인종 때 민칭도의 증손 민영모(閔令謨)는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이르렀다. 민영모의 아들 민식(閔湜)은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냈으며, 민공규(閔公珪)는 판병부사(判兵部事)와 태자소보(太子小保)에 올라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고려 후기 충숙왕 때 인물인 문인공(文仁公) 민귀(閔貴)의 후손인 문인공파와 대제학을 지낸 문순공(文順公) 민적(閔頔)의 후손인 문순공파로 양분되어 있다.

[입향 경위]

여흥민씨는 원래 경기도 양주 일대에서 세거하다가 민후건(閔後騫)[1571~1652]이 17세기 초반에 이르러 세종 지역에 입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흥민씨의 세종 지역 입향 시기와 장소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민후건의 아버지 민호(閔浩)[1550~1594]가 임진왜란 중에 45세의 나이로 피란지인 정주(定州) 땅에서 죽었다. 당시가 어수선한 시대여서 1603년에야 비로소 전의(全義)로 귀장(歸葬)하였다가 또다시 자리가 좋지 않아 1632년에 연기현(燕歧縣) 북쪽 월하방(月河坊)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민후건의 어머니 연안이씨(延安李氏)[1550~1620]의 가문이 공주·천안·연기 등지에 세거하고 있었으므로 월하리에도 민후건 외가의 기반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는 민후건의 누이가 청주한씨(淸州韓氏) 참봉 한후민(韓後敏)에게 출가하였고 민후건의 처 역시 청주한씨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처향(妻鄕)[아내의 관향]을 따라 입향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민후건은 1606년(선조 39) 진사에 입격(入格)[시험에 뽑힘]한 방목(榜目)에 거주지가 청주로 기재되어 있으며, 청주한씨 한충을 제향하는 서원인 봉암서원의 사액을 청하는 봉암서원 청액소를 올릴 때 민후건도 유생들의 대표로 이름을 올렸다.

[현황]

효자 민후건 정려가 있는 월동은 민뜸이라 부르기도 한다. 민씨들이 오랜 세월 동안 터를 잡고 살아온 마을이기 때문이다. 월동에는 민씨 가의 오래된 종가가 있었다. 고풍스러운 기와집 주위에는 탱자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효자 민후건 정려는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동면 보덕리 보평마을에도 제일 먼저 들어온 성씨는 여흥민씨이다. 다음으로는 강릉김씨가 마을에 들어왔으며, 다음으로 마을에 많이 거주한 성씨는 청주한씨였다. 그러나 현재는 여흥민씨와 강릉김씨는 대부분 마을을 떠나고, 청주한씨도 많이 살고 있지 않다.

[관련 유적]

연서면 월하리에는 민후건 묘소와 묘비, 효자 민후건 정려 등이 있다. 효자 민후건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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