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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평윤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582
한자 海平尹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임선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564년(명종 19) - 윤승임 출생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624년(인조 2) - 윤승임 사망
본관 해평윤씨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입향지 해평윤씨 입향지 - 충청북도 청주시 옥산
묘소|세장지 윤승임 묘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예양리 산소동 지도보기
성씨 시조 윤군정
입향 시조 윤승임

[정의]

윤군정을 시조로 하고 윤승임을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세종특별자치시의 해평윤씨는 문영공파에 속하는 남원공파의 윤승임이 1600년 즈음에 연동면 예양리에 입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승임의 5대조 윤제가 세조의 계유정변 때 난신(亂臣)[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으로 연좌(緣座)되어 안치(安置)[조선시대에 먼 곳에 보내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게 주거를 제한하던 일 또는 그런 형벌]되었다가 1468년에 풀려난 후 충청북도 청주시의 옥산에 입향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윤승임 대에 이르러 후손들의 거주지가 세종특별자치시까지 확산한 것으로 추측된다.

[연원]

해평윤씨(海平尹氏)의 시조(始祖) 윤군정(尹君正)은 고려 고종과 원종 때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사공(守司公)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판공부사(判工部事)에 이르렀다. 윤군정의 손자 윤석(尹碩)은 고려 충숙왕 때 대언(代言)[고려시대에 밀직사에 속하여 왕명을 하달하는 일을 맡아 보던 벼슬]이 되어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탁월한 외교 수단으로 행성(行省)의 설치를 중지시켰다. 공(功)으로 충근절의동덕찬화보정공신(忠勤節義同德贊化保定功臣)에 책록되고 관직이 벽상삼중대광(壁上三重大匡) 도첨의사(都僉議司) 좌정승(左政丞)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에 올랐으며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해평을 본관(本貫)으로 하였다. 윤군정의 증손 대에서 해평윤씨는 문영공파(文英公派)와 충간공파(忠簡公派)로 나뉜다.

[입향 경위]

연동면 예양리 해평윤씨는 문영공파에 속하는 남원공파(南原公派)로 입향조는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윤승임(尹承任)[1564~1624]으로 알려져 있다. 자세한 입향 사유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윤승임의 5대조인 직장공(直長公) 윤제(尹濟)가 벼슬을 사양하고 토지가 비옥하고 민심이 좋은 가까운 이웃 마을 청주의 옥산(玉山)으로 들어와 살고 있었고 그 후 후손이 번성하여 차츰차츰 좋은 땅을 찾아 옮겨 살면서 자연스럽게 연동면 예양리까지 들어오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연동면 예양리는 연기 땅이 아니었고 옥산과 같이 청주에서 관할하던 땅이었다. 그렇다면 윤승임을 입향조로 보기보다는 윤승임의 5대조 윤제를 입향조로 보고 입향지를 옥산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편 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세조의 계유정변 때 난신(亂臣)[나라를 어리접히는 신하]으로 연좌되어 안치된 윤제는 1468년(세조 14)에 방면(放免)되고 1472년(성종 3)에는 고신(告身)[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을 돌려받았다.

[현황]

해평윤씨 남원공파는 충청북도 청주시 옥산을 중심으로 청주시 송원동 일대에 거주하고 있다.

[관련 유적]

윤승임의 묘는 연동면 예양리 산소동에 있으며 묘 앞에는 오래된 상석(床石)[무덤 앞에 제물을 차려 놓기 위하여 넓적한 돌로 만들어 놓은 상]과 비석 및 문인석(文人石)[능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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