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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610
한자 金休
영어공식명칭 Kim Hyu
이칭/별칭 연부,학당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미곡리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윤철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50년(충정왕 2)연표보기 - 김휴 출생
몰년 시기/일시 1430년(세종 12)연표보기 - 김휴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19년(순조 19)연표보기 - 김휴 유허비 건립
거주|이주지 김휴 낙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미곡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김휴 유허비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미곡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안동
대표 관직 검교근시

[정의]

조선 전기 세종 지역으로 낙향하여 은거한 고려 후기 문신.

[가계]

김휴(金休)[1350~?]의 자는 연부(鍊夫), 호는 학당(學堂)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김방경(金方慶)[1212~1300]의 현손이다. 아버지는 고려시대에 공조전서를 지낸 김성목(金成牧)이다.

[활동 사항]

김휴는 정몽주의 문하생이며, 공민왕 때 검교근시(檢校近侍)를 지냈다. 이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를 때 호군의 명을 받았으나 연로한 아버지를 모신다는 핑계로 사양하고 낙향하여 현재의 세종특별자치시 운주산 자락에서 은거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다시 가선검교 한성좌윤(嘉善檢校漢城左尹)이라는 벼슬을 내려 김휴를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 열중하였다. 김휴의 문하생 중에서 충효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김휴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손에게는 법도를 가르쳤으며 신의로 벗을 사귀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듣기 싫어하므로 사람들이 김휴를 존경하였다. 나중에 김휴의 덕망과 절의가 훌륭하다 하여 유림 명인들이 유허비를 세웠다.

김휴가 은거한 곳은 김휴의 호를 따서 학당리라 하였는데 지금까지 그대로 불리고 있다. 김휴는 세종 지역에 처음으로 연고를 둔 안동김씨 입향조로 알려져 있다.

[상훈과 추모]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미곡리 학당마을에 고려검교김공유허비(高麗檢校金公遺墟碑)가 있다. 1819년 5월에 송치규(宋穉圭)[1759~1838]가 찬(撰)하였고, 후면의 행장은 외후손인 삼주(三州) 이채(李采)[1745~1820]가 찬하고 김광(金鑛)이 서(書)하여 1819년(순조 19)에 세웠다. 비의 내용은 정몽주가 순절하자 김휴가 세상을 한탄하고 벼슬길에서 떠나 향리로 내려와서 강학으로 일생을 마친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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