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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618
한자 成熺
영어공식명칭 Seong Hui
이칭/별칭 용회,인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450년(세종 32)연표보기 - 성희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52년(문종 2)연표보기 - 성희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454년(단종 2)연표보기 - 성희 문종실록 편찬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456년(세조 2) - 성희 김해에 안치됨
활동 시기/일시 1461년(세조 7) - 성희 안치에서 풀려남
활동 시기/일시 1471년(성종 2) - 임금이 성희의 고신을 돌려주도록 함
몰년 시기/일시 1464년(세조 10)연표보기 - 성희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87년(정조 11) - 성희 충현서원에 추배됨
추모 시기/일시 1791년(정조 15)연표보기 - 성희 장릉 배식단에 추향됨
거주|이주지 은거지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창녕
대표 관직 한성부참군|승문원교리|예조참판

[정의]

조선 전기 세종 지역에 정착한 창녕성씨 입향조이자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한 문신.

[개설]

성희(成熺)[?~1464]는 창녕성씨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창녕성씨가 자리 잡게 된 계기를 마련한 인물이다. 5촌 조카 성삼문이 세조에게 처형된 후 일족이 모두 죽임을 당하는 과정에서 성희도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고 김해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달전리에 터를 잡았다.

[가계]

성희의 본관(本貫)은 창녕이고 자는 용회(用晦), 호는 인재(仁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민부상서 성여완(成汝完), 할아버지는 예문관대제학 성석용(成石瑢)이다. 아버지는 성개(成槪), 어머니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박가실(朴可實)의 딸이며 부인은 호조판서 이견기(李堅基)의 딸이다. 슬하에 성담수, 성담년 형제를 두었다. 성희는 사육신 성삼문의 종숙부(從叔父)[작은아버지뻘 되는 종숙]이다.

[활동 사항]

성희는 학식과 덕망으로 천거(薦擧)[어떤 일을 맡아 할 수 있는 사람을 그 자리에 쓰도록 소개하거나 추천함]되어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을 지내고 1450년(세종 32) 문과 급제 후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가 되었다. 1452년(문종 2) 『세종실록(世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1454년(단종 2)에는 『문종실록(文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5촌 조카인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에 있으면서 죽든 살든 마음을 바꾸지 말자고 서로 격려하였고 단종 복위가 실패로 돌아가 성삼문 등이 죽을 때 함께 국정(鞫庭)에 잡혀 들어가 16차례나 극심한 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발설하지 않았다. 성희의 부인과 친족은 노비가 되고 재산은 몰수된 채 경상도 김해의 해변에 위리안치(圍籬安置)[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일]되었다가 풀려난 후에 끝내 충분(忠憤)[충의로 인한 분한 마음]에 겨워 사망하였다.

성씨 문중에 의하면 성희가 김해에서 서울로 돌아가던 중 부강에 이르렀는데 세조가 서울의 300리[약 120㎞] 밖에서 살라는 명을 내려 서울로 더 이상은 못 가고 옛 연기군 남면 양화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이 마땅치 않아 다시 금강을 건너 금남면 달전리에 터를 잡게 된 것이라 전한다.

[학문과 저술]

성희의 저서로 『인재집(仁齋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권상하(權尙夏)의 묘표에 “희가 삼문과 함께 왕실을 보필하여 죽고 사는 일로 그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삼문 등이 죽자 도 역시 엄한 국문을 받고 귀양 갔으며 처자는 노비가 되고 재산은 몰수당하였다. 그 뒤 3년 만에 용서를 받았으나 끝내 충성과 의분에 겨워 죽고 말았다.”라고 쓰여 있다. 1791년 장릉의 배식단에 추향(追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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