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성담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619
한자 成聃壽
영어공식명칭 Seong Damsu
이칭/별칭 인수,정재,정숙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거주|이주지 은거지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서산서원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군로 1235[원북리 537-2]
사당|배향지 물계서원 -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모산1길 109-36[모산리 80]
성격 충신
성별
본관 창녕
대표 관직 이조판서

[정의]

조선 전기 세종 지역 출신 문신으로 단종을 위하여 절개를 지킨 생육신의 한 사람.

[개설]

성담수(成聃壽)는 1456년 단종 복위가 실패한 후 벼슬을 버리고 선영(先塋)[조상의 무덤 또는 조상 무덤 근처의 땅]이 있는 경기도 파주에 은거하며 끝까지 절개를 지킨 생육신 중 한 사람이다.

[가계]

성담수의 본관(本貫)은 창녕(昌寧)이다. 자는 인수(仁叟), 호는 정재(靜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예문관대제학 성석용(成石瑢), 할아버지는 성개(成槪), 아버지는 승문원교리 성희(成熺), 어머니는 호조판서 이견기(李堅基)의 딸이다.

동생 성담년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에 세거하는 창녕성씨 입향조이다.

[활동 사항]

1456년(세조 2) 성삼문 등 사육신이 주도한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였다.

부친 성희가 혹독한 국문(鞠問)[국청에서 형장을 가하여 중죄인을 신문하던 일]을 받고 김해에 안치(按治)[죄를 조사하여 다스림]되었다가 3년 후 돌아와 끝내 사망하자 성담수는 벼슬을 포기하고 선영이 있는 파주에 은거(隱居)[세상을 피해서 숨어 삶]하여 평생 시를 짓고 낚시질을 하며 관직을 멀리하였다.

성종이 성담수 등 문신들에게 시를 짓게 해서 병풍에 쓰게 하였고, 1476년(성종 7) 병풍이 완성되자 성종은 어의와 선온(宣醞)[임금이 내리는 술]을 내려 주었다.

당시 『성종실록(成宗實錄)』의 기록에는 사신의 논평이 실렸는데, “성담수는 천성이 담박(淡泊)하여 사물(事物)에 대하여 욕심내는 것이 없었다. 부모가 일찍 죽으니 가산(家産)은 모두 아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집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태연하게 생활하였다. 어린 세 아우를 길러 혼인(婚姻)을 시켜 주고 어루만지며 사랑하기를 부모 못지않게 하니 사람들이 많이 칭찬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묘소]

성담수의 묘소는 실전(失傳)[묘지나 고적 따위에 관련되어 전하여 오던 사실을 알 수 없게 됨]되었고 자손도 계속 이어지지 못하였다.

[상훈과 추모]

생육신의 기록은 1660년 윤순거(尹舜擧)가 편찬한 『노릉지(魯陵誌)』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736년(영조 12) 『영조실록(英祖實錄)』에는 강원도 영월 유생의 상소에 성담수 등 생육신에 대한 추숭(追崇)이 없어 두어 칸 집을 지어 제향(祭享)[제사]을 올리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1782년(정조 6)에 김시습(金時習), 원호(元昊), 남효온(南孝溫) 등과 함께 이조판서로 추증(追贈)[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죽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벼슬을 주던 일]되었다. 1784년에는 정숙(靖肅)이라는 시호(諡號)[제왕이나 재상,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가 내려졌다.

1877년 이맹전, 조여, 원호, 성담수 등 4인에 대한 제사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문제가 논의되었고, 1884년 각도 유생들이 창절사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였으나 추향(追享) 문제를 바로 결정하지 않았다. 경상남도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祭享)되어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