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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627
한자 南以雄
영어공식명칭 Nam Yiung
이칭/별칭 적만,시북,문정공,춘성군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75년(선조 8)연표보기 - 남이웅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06년(선조 39) - 남이웅 진사시 합격
활동 시기/일시 1607년(선조 40) - 남이웅 왕자의 사부가 됨
활동 시기/일시 1613년(광해군 5) - 남이웅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24년(인조 2) - 남이웅 진무공신 3등 춘성군에 봉하여짐
활동 시기/일시 1626년(인조 4) - 남이웅 인목대비 상사에 수릉관이 됨
활동 시기/일시 1635년(인조 13) - 남이웅 강화도유수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36년(인조 14) - 남이웅 좌찬성에 오름
활동 시기/일시 1638년(인조 16) - 남이웅 대사헌이 됨
활동 시기/일시 1640년(인조 18) - 남이웅 형조판서가 됨
활동 시기/일시 1646년(인조 24) - 남이웅 사직
몰년 시기/일시 1648년(인조 26) - 남이웅 좌의정이 됨
몰년 시기/일시 1648년(인조 26)연표보기 - 남이웅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58년(효종 9) - 남이웅 묘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06년(고종 43) - 남이웅 남산영당 건립
묘소|단소 남이웅 묘소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봉곡리
사당|배향지 금남 남산영당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남산길 51-2[성강리 201-2]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의령
대표 관직 좌의정

[정의]

조선 후기 세종 지역에 묘를 쓴 문신.

[개설]

남이웅(南以雄)[1575~1648]은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에 정치권의 핵심에 있던 인물이다.

[가계]

남이웅은 본관(本貫)이 의령(宜寧)이고, 자는 적만(敵萬), 호는 시북(市北)이다. 할아버지는 증좌찬성 남응운(南應雲)이다. 아버지는 군자주부(軍資主簿)를 지내고 참판에 추증된 남위(南瑋)이고, 어머니는 청주한씨이다.

남이웅의 부인은 남평조씨 조애중이며, 부인이 지은 『남평조씨 병자일기』가 유명하다.

남이웅은 6형제 가운데 셋째로 아버지의 6촌인 남대우(南大佑)의 양자(養子)[아들이 없는 집에서 대를 잇기 위하여 동성동본 중에서 데려다 기르는 조카뻘 되는 남자아이]가 되었다.

정묘호란 때 안주성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친 남이흥(南以興) 장군과 인조 때 대북의 영수이던 남이공(南以恭) 등과 모두 사촌간이다.

[활동 사항]

남이웅은 1606년(선조 39) 진사시 합격 후 왕자 사부를 거쳐 세마·위솔·통례 등을 지내고, 1613년(광해군 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수찬·응교 등을 지냈다.

인조반정 후 오위장·황해도관찰사·안악군수 등을 지냈고, 이괄의 난에 황주수성대장으로 도원수 장만(張晩)을 도와 공(功)을 세워 진무공신 3등에 춘성군에 봉하여졌다.

호조와 형조의 참판, 강릉부사, 경기도·충청도·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병자호란 때는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扈從)[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따르던 일]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으로 끌려갈 때 우빈객(右賓客)[조선시대 문관 벼슬]으로 세자를 호위하였고, 1년 반 만에 돌아와 춘성부원군에 봉하여지는 등 당대 정치권의 핵심에 있었다.

남이웅의 부인 남평조씨 조애중이 쓴 『남평조씨 병자일기』에 병자호란과 그후의 정치적 사건들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남이웅은 귀국 후 대사헌과 한성판윤 등을 역임하였고, 형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냈다. 1646년(인조 24)에 우의정이 되었으나 소현세자빈 강씨(姜氏)의 사사(賜死)[죽일 죄인을 대우하여 임금이 독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하던 일]를 반대하여 사직하였다가 1648년(인조 26) 좌의정이 되었다.

남이웅은 성격이 호방하고 원만하여 당파에 치우치지 않았으며, 만년에 병이 깊어지자 인조가 어의(御醫)[궁궐 내에서 임금이나 왕족의 병을 치료하던 의원]를 보내어 어약(御藥)으로 돌보게 할 정도로 인조의 신임이 두터웠다.

1648년(인조 26) 7월 18일 74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자식들에게 시호(諡號)[제왕이나 재상,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를 청하지 말도록 유언하였지만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또한 남이웅의 성품에 대해서는 『인조실록』의 졸기(卒記)[죽은 사람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쓰는 평가]에 “우의정 남이웅은 젊어서부터 기절이 있었으며 재물에는 소홀했고 의를 좋아했다. 정승의 지위에 올라서는 아무것도 건백(建白)[관청에나 윗사람에게 의견을 말함]한 것이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으로 졸하였다.”라는 짧은 글로 소개되어 있다.

남이웅이 세상을 떠난 후 금남면 성강리에 묘와 영당이 조성되어 있으며, 후손들이 대를 이어 보살피고 있다.

[묘소]

남이웅의 묘는 계룡산 산줄기가 이어져 있는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봉곡리에 조성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남이웅 사후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1658년에 묘비가 건립되었다. 1906년 영정을 모시고 제향(祭享)[제사]하는 금남 남산영당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성강리에 건립되었다.

금남 남산영당은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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