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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후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631
한자 愼後尹
영어공식명칭 Shin Huyun
이칭/별칭 야수,대곡선생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관정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상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40년(인조 18)연표보기 - 신후윤 출생
몰년 시기/일시 1713년(숙종 39)연표보기 - 신후윤 사망
거주|이주지 신후윤 거주지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관정리 취촌 지도보기|대곡리지도보기
수학지 신후윤 수학지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3길 26-14[임리 74]
묘소|단소 신후윤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관정리 취촌 뒷산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삼현사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관정리 302 지도보기
성격 문신|학자
성별
본관 거창신씨
대표 관직 지평

[정의]

조선 후기 세종 지역 출신의 문신.

[개설]

신후윤(愼後尹)[1640~1713]의 호는 야수(野獸)이다.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관정리 취촌·대곡리에서 살았으므로 모두 신후윤을 대곡선생이라 하였다.

숙종 대의 복잡다단한 정파적 이해관계 속에서 스승 타우 이상과 우암 송시열을 향한 사은(師恩)[스승의 은혜]으로 충효와 더불어 유자(儒者)[유학을 공부하는 선비]의 책무인 스승[師]에 대한 예(禮)로 일관된 생을 보냈다.

[가계]

신후윤은 거창신씨의 전의 입향조인 신재(愼在)[1537~1605]의 손자이다.

신재는 참찬 신희복(愼希復)[1493~1565]의 3남이다. 신재의 조부인 신수정(愼樹正)[1474~1520]이 중종반정 때 천안으로 낙향하였고, 1600년대 신재가 전의로 이주한 이래 후손들이 전의면 관정리석곡리 일대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타우 이상의 백부인 이유경(李有敬)[?~1630]이 신재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타우의 대표적인 제자인 신후윤도 같은 집안 출신이다. 또 조부 신수웅(愼秀雄)이 신재의 2남이다.

[활동 사항]

신후윤은 어릴 적부터 행동이 무겁고 말이 적었으며, 모든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는 성품을 가졌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에게 수학하여 덕망 있는 군자의 품위를 갖추었다.

신후윤은 스승인 이상의 무고함을 여러 차례 상소한 정황이 『숙종실록(肅宗實綠)』에 실려 있다. 『숙종실록』 14년(1688) 11월 21일 ‘이상(李翔)을 삭판(削版)하라는 명이 내렸을 때에 전의(全義)의 유생(儒生) 신후윤(愼後尹)이 문생(門生)임을 이유삼아 무리한 무리를 많이 거느리고 서로 상소하여 신구(伸救)하였다’는 기록과 『숙종실록』 16년(1690) 1월 29일 ‘이상(李翔)의 문인(門人) 신후윤(愼後尹) 등 10여 인이 상소(上疏)하여 다투어 변명하였는데, 임금이 엄한 분부로 상소를 돌려주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신후윤은 숙종의 후사와 관련된 참담한 당쟁 시기에 스승의 무고함에 목숨을 걸고 앞장서서 소(疏)로써 임금께 여러 차례 상소하여 스승 타우 이상의 공초(供招)[조선 시대에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던 일 또는 죄인이 털어 놓은 범죄 사실에 관한 진술]가 공정하지 못함을 논박(論駁)[어떤 주장이나 의견에 대하여 그 잘못된 점을 조리 있게 공격하여 말함]한 선비였다.

나이 들어서는 글과 시를 좋아하였으며, 성리학을 연구하여 서책을 발간하였다. 옥중에서 병들어 죽게 되니 예를 다하여 상(喪)을 치렀다.

[학문과 저술]

신독재 김집에게 수학하여 학문이 높고 효행이 올바르며 타우 이상의 고제(高弟)[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제자]로 화양동 산중으로 우암 송시열을 이상과 함께 따라가 섬기었다.

시(詩), 서(書), 수(授), 약(略), 식(識), 소(疏), 유사(遺事)[죽은 사람이 남긴 사적(事跡)], 행장(行狀) 등 유고(遺稿)[죽은 사람이 생전에 써서 남긴 원고]를 남겼다.

[묘소]

신후윤의 묘소는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관정리 취촌 뒷산에 위치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조정에서 신후윤을 사헌부지평(持平)으로 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하고 전의현 삼현사(三賢祠)에 배향(配享)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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