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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632
한자 李慶億
영어공식명칭 Yi Gyeongeok
이칭/별칭 석이,화곡,문익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대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20년(광해군 12)연표보기 - 이경억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51년(효종 2) - 이경억 파직됨
활동 시기/일시 1653년(효종 4) - 이경억 순안어사가 됨
활동 시기/일시 1658년(효종 9) - 이경억 충청도관찰사|승지가 됨
활동 시기/일시 1659년(효종 10) - 이경억 대사성|대사간|예조참의를 역임함
활동 시기/일시 1668년(현종 9) - 이경억 동지사|경기도관찰사가 됨
몰년 시기/일시 1673년(현종 14)연표보기 - 이경억 사망
출생지 이경억 출생지 - 서울
묘소|단소 이경억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대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경주
대표 관직 좌의정

[정의]

조선 후기 세종 지역에 묘를 쓴 문신.

[개설]

이경억(李慶億)[1620~1673]은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석이(錫爾), 호는 화곡(華谷)이다. 1644년 25세 때 정시문과에서 장원급제한 후 고위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가계]

이경윤(李燝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대건(李大建)이다. 아버지는 판서 이시발(李時發)이며 어머니는 고령신씨 신응거(申應榘)의 딸이다. 배위(配位)[남편과 아내가 모두 죽었을 때 그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는 해평윤씨 윤원지의 딸이다. 슬하에 이인소·이인병·이인엽 세 아들을 두었다.

[활동 사항]

이경억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난 수재로 알려졌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25세가 되던 1644년에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면서 관직에 올라 예조좌랑·병조좌랑·세자시강원사서·제주안핵어사·사간원정언 등을 지내었다. 1651년 귀인조씨와 김자점 역모사건과 관련하여 대사헌 조석윤이 파직당하자 반대하다가 효종의 노여움을 사 경성(鏡城)으로 안치(安置)[조선시대 먼 곳으로 보내어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게 주거를 제한하던 일 또는 그런 형벌]되었다. 이경억을 구하려던 이들이 계속 상소를 올리는 가운데 정언 오핵(吳翮)은 이경억의 성품과 행실이 꼿꼿하며 거리낌없이 간언(諫言)하는 풍도(風度)[풍채과 태도]가 있는 데다 노모를 모시고 있다고 전하기도 하였다. 영의정 김육, 수찬 민정중, 지경연 박서 등도 이경억의 죄를 풀어 줄 것을 청하였지만 효종은 끝내 답하지 않다가 1652년 2월에 석방을 명하였다.

1653년 이경억은 순안어사로 영남 지방을 시찰하였고 수찬·부교리·응교 등을 거쳐 1659년에는 대사간에 이어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당시 충청도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진상품인 고니를 구하지 못하여 어려워하자 산기러기로 대체하게 한 일화가 있다.

1658년 승지, 1659년 대사성·대사간·예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668년 동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경기도관찰사를 지내었다. 이후 이조·호조·예조·형조판서와 우의정·좌의정을 지내었다. 1673년 사망한 후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 졸기(卒記)[아무개 졸(卒)이라고 쓴 후에 사관이 망자에 대한 세간의 혹은 자신의 평가를 서술한 것]에 의하면 이경억 형제가 같은 해 등과하여 고위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영민하고 예리하여 동료들의 중망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경억의 묘를 금남면 영대리에 조성하면서 후손들이 세종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다.

[학문과 저술]

이경억의 저서로는 『화곡유고』가 있다.

[묘소]

이경억의 묘는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대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경억은 ‘문익(文翼)’이란 시호(諡號)[제왕이나 재상,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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