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673
한자 趙秀彬趙命彬
영어공식명칭 Jo Subin and Jo Myeongbin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원성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윤철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45년(영조 21)연표보기 - 조수빈 출생
출생 시기/일시 1749년(영조 25)연표보기 - 조명빈 출생
몰년 시기/일시 1824년(순조 24)연표보기 - 조수빈 사망
몰년 시기/일시 1832년(순조 32)연표보기 - 조명빈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32년(순조 32) - 경주김씨의 정려를 받음
추모 시기/일시 1842년(헌종 8) - 조수빈의 정려를 받음
추모 시기/일시 1854년(철종 5) - 조명빈의 정려를 받음
출생지 조수빈·조명빈 출생지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원성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양주조씨 삼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원성리 50 지도보기
성격 효자
성별
본관 양주

[정의]

조선 후기 세종 지역 출신의 형제 효자.

[가계]

조수빈(趙秀彬)[1745~1824]과 조명빈(趙命彬)[1749~1832]은 조말생의 12세손으로, 아버지는 조태연(趙泰衍)이다.

[활동 사항]

조수빈과 조명빈은 형제로 둘 다 효성이 지극하였다.

조수빈이 7세 때 어머니가 병이 들자 치료에 필요한 약을 백방으로 구해서 치료하였고, 형제가 손가락을 잘라 피를 어머니께 드렸다.

또한 형제는 모친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목욕재계하고 밤낮으로 기도하는 정성으로 모친이 쾌차하였다.

이후 모친이 가려움증으로 고생하자 특효가 있다는 신초근(莘草根)[족두리풀의 뿌리]을 구하려고 엄동설한에 눈 덮인 산을 샅샅이 뒤져 가며 찾아내 병을 고쳤다고 한다.

모친이 89세로 장수하고 숨을 거두자 3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상훈과 추모]

조수빈의 효행에 대하여 고을에서 7번, 향교에서 8번 효자로 천거(薦擧)[어떤 일을 맡아 할 수 있는 사람을 자리에 쓰도록 소개하거나 추천함]하였다.

조수빈은 죽은 후 18년이 흐른 1842년(헌종 8)에 효자로 명정(銘旌)[충·효·열을 행한 사람에게 나라에서 주는 최고의 포상]을 받았고, 조명빈조수빈이 명정을 받고 12년이 지난 1854년(철종 5)에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 등을 동네에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를 받았다.

두 형제를 기리기 위한 정문 현판(旌門懸板)은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원성리 50번지삼쌍 효열문에 있다. 삼쌍 효열문에는 열녀 경주김씨 현판도 함께 있다.

경주김씨[1764~1816]는 김상종(金相宗)의 딸로, 조수빈의 종손 조백규(趙百逵)에게 출가한 인물이다.

경주김씨는 효성으로 시부모를 섬겼으며, 남편이 병을 얻자 정성으로 보살폈으나 사별하고 말았다.

경주김씨는 남편이 죽자 빈소(殯所)[상여가 나갈 때까지 관을 놓아 두는 방]에서 염습(殮襲)[시신을 씻긴 뒤 수의를 갈아입히고 염포로 묶는 일]을 마치고 상복을 입은 후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조정에서는 1832년(순조 32) 경주김씨에게 정려를 내렸다.

양주조씨 삼효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