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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731
한자 鄭靖和
영어공식명칭 Jeong Jeonghwa
이칭/별칭 정묘희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대곡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정을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0년연표보기 - 정정화 출생
몰년 시기/일시 1991년연표보기 - 정정화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정정화 건국훈장 애족장 수여
출생지 정정화 - 서울 종로구 장사동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세종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정정화는 임시정부 활동을 한 인물이다.

[가계]

1900년 8월 3일 서울 종로구 장사동에서 정주영의 큰딸로 태어났다. 1910년 동농 김가진의 아들인 김의한과 혼례를 치렀다.

[활동 사항]

정정화(鄭靖和)[1900~1991]는 1910년 동농 김가진의 아들인 김의한과 혼례를 치렀다.

김가진은 1894년 공조판서, 1895년 농상공부 대신, 1900년 중추원의장, 1906년 5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충청남도 관찰사를 지냈다. 1909년 대한협회 회장을 맡았으며, 경술국치 후 일제는 김가진에게 남작 지위와 함께 은사공채 25,000원을 지급하였다. 이후 김가진은 일제의 혜택을 거부하였다.

1919년 10월 김가진과 김의한이 이종욱의 안내로 경의선을 타고 신의주로 갔다가 단둥[丹東]을 거쳐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였다.

소식을 접한 정정화는 이듬해 상하이로 망명하면서 상해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맡게 되었다. 특히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여자의 몸으로 여섯 차례나 국내로 잠입해서 활동하였다.

연통제가 이미 무력화된 상황 속에서 정정화의 활동은 상해임시정부와 국내를 소통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32년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일제의 탄압이 더욱 거세지면서 임시정부는 고난의 이동을 하게 되었다. 이때 정정화는 임시정부 대가족의 종부(宗婦)[종가의 맏며느리]로서 살림을 책임지고 있었다.

항저우[杭州], 난징[南京],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를 거쳐 치장[綦江]과 충칭[重慶]에 안착한 여정은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충칭에서 정정화는 1940년 한국독립당이 창당될 때 당원으로 참여하였으며, 한국독립당 산하 단체인 한국혁명여성동맹에서 간사로 활동하였다.

정정화는 정치적 참여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손님맞이를 책임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1943년 대한애국부인회를 재건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좌우통합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국내외 부녀의 총단결을 도모하는 데 노력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정정화의 공적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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