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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899
한자 鳥致院鳳山影堂
분야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로 90-11[봉산리 193]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안경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영조시대 - 조치원 봉산영당 건립 추정
문화재 지정 일시 1984년 5월 17일연표보기 - 조치원 봉산영당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7호 지정
문화재 해지 일시 2012년 7월 1일연표보기 - 조치원 봉산영당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7호 지정 해지
문화재 지정 일시 2012년 12월 31일연표보기 - 조치원 봉산영당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5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조치원 봉산영당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재지정
현 소재지 조치원 봉산영당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로 90-11[봉산리 193]지도보기
원소재지 조치원 봉산영당 -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 봉산리 193
성격 건물
양식 맞배지붕
정면 칸수 3칸
측면 칸수 1칸
관리자 강화최씨 종중
문화재 지정 번호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리에 있는 최용소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조선 후기에 세운 사당.

[개설]

조치원 봉산영당제정공(齊貞公) 최용소(崔龍蘇)[?~1422]의 영정(影幀)[제사나 장례를 지낼 때 위패 대신 쓰는, 사람의 얼굴을 그린 족자]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최용소의 영정은 명나라 황제 성조(成祖)가 화공을 시켜 그려 보낸 것이라고 한다.

제정공 최용소는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 문신이다. 감찰규정, 계림판관, 관군, 만호, 공조전서, 강원도 관찰사, 좌군총제, 형조판서 등을 거쳐 1413년(태종 13)에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명나라에 있을 때 옥하관의 건축을 감독하여 황제의 신임을 받았고,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특히 청백하면서도 절개가 굳고 언행이 정중한 최용소의 성품에 당시 명의 황제 성조가 감탄하였다고 한다.

후에 최용소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은 성조가 슬피 탄식하며 영정 2점을 그려 후손들에게 내리면서 영당(影堂)[영정(影幀)을 모셔 둔 사당]이 설립되었다.

[위치]

조치원읍 봉산리 중뜸 마을 입구에서 북쪽으로 약 100m 안쪽의 토흥산 남향에 있다.

[변천]

명나라 성조가 최용소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최용소를 다시 볼 수 없음을 한탄하며 화공을 불러 최용소의 영정 2점을 그리게 하여 한 폭은 자신이 갖고 다른 한 폭은 최용소의 자손에게 주었다.

이 영정을 모신 재실(齋室)[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이 봉산영당으로 영조 때 지어져 지금까지 영정을 모시고 있다.

얼마 전까지 당시의 영정을 걸어 추모하였으나 현재는 진품을 도난당하여 복제품을 보관하고 있다.

[형태]

조치원 봉산영당은 솟을삼문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낮은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최근에 정비가 이루어져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다.

[현황]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7호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 세종특별자치시 출범으로 같은 해 12월 31일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로 다시 재지정되었다.

현재 조치원 봉산영당에서는 영정을 모시고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의의와 평가]

조치원 봉산영당은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 인물인 최용소와 관련된 유적으로, 최용소의 인물됨을 추측할 수 있는 자료임과 동시에 조치원읍 봉산리에 세거한 강화최씨들의 사족(士族)[문벌이 좋은 집안] 활동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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