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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914
한자 孝子崔澮旌閭
분야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리 138-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고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86년연표보기 -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980년대 중반 - 중수
문화재 지정 일시 2001년 05월 31일연표보기 - 연기군 향토유적 제3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14년 09월 30일연표보기 -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호 지정
문화재 해지 일시 2014년 09월 30일연표보기 - 효자 최회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3호 지정 해지
현 소재지 효자 최회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리 138-1 지도보기
원소재지 효자 최회 정려 -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 봉산리 192
성격 정려
양식 맞배지붕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강화최씨 문중
관리자 강화최씨 문중
문화재 지정 번호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호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리에 있는 최회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후기에 세운 정려.

[개설]

효자 최회 정려강화최씨 효자 최회(崔澮)[1563~1621]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것이다. 최회의 자는 경택(景澤)이다. 아버지는 최중룡(崔重龍)[1543~1575]이고 어머니는 강릉김씨 참봉 김봉조(金奉祖)의 딸이다.

강화최씨최회의 조부인 최완(崔浣)이 기묘사화를 피하여 서울 종로5가 효제동에서 이주하면서 연기 지역에 세거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최회의 아버지 최중룡은 일찍이 효행이 뛰어난 인물로, 세칭 해동대순(海東大舜)으로 일컬어졌다.

최중룡은 약관의 나이에 현 봉산리 마을 입구에 향나무[천연기념물 제321호]를 심으며 대대로 효가 번창하기를 기원하였는데 이후 강화최씨 집안은 이를 본받아 8대에 걸쳐 10명의 효자와 5명의 열부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최회 역시 효성이 깊어 13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고, 홀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던 중 어머니가 병들자 최선을 다하여 간호하다 피로가 누적되어 5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위치]

조치원읍에서 전동면 방향으로 국도 제1호를 타고 1㎞ 정도 가다 보면 오른쪽에 세종여자고등학교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오고, 그 입구에서 다시 1㎞ 정도 가면 봉산리가 나온다.

봉산리 중뜸마을 입구에서 남쪽으로 500m 거리에 효자 최회 정려가 있다.

[변천]

1702년(숙종 28) 증손 최훤(崔煊)이 찬한 행장에 의하면 최회가 죽은 후 그의 효행을 안타깝게 여긴 양빙(楊憑) 등 연기 사림들이 조정에 상서하여 최회가 죽은 지 65년 후인 1686년(숙종 12)에 명정을 받아 정려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에 중수하였다.

[형태]

정려는 정면·측면 각 1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리고, 양 측면에는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8각형 화강암 고주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으며, 사면에는 홍살을 돌렸다.

정려 바닥은 시멘트로 보수하였고, 정려 주변에는 낮은 철책을 설치하였다.

[현황]

내부 중앙 상단에는 최회의 명정 현판[孝子成均生員崔澮之閭 崇禎丙寅 五月 日 命旌, 196×23㎝]이 걸려 있고, 그 위에는 1702년(숙종 28) 증손인 최훤이 찬한 행장기[196×50㎝]가 걸려 있다.

현재 정려 주변 바닥은 시멘트로 잘 정리되고 쇠창살을 둘러 깨끗이 보존·관리되고 있다. 효자 최회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최회는 아버지를 따라 양세에 효를 실천하여 명정을 받은 인물로, 최회의 이러한 삼강덕목 실천은 강화최씨 집안에 대대로 이어져 8대에 걸쳐 10명의 효자와 5명의 열부를 낳는 시초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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