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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921
한자 孝子成爾復旌閭
이칭/별칭 양숙
분야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와촌리 산 93-1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고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92년연표보기 - 효자 성이복 정려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973년 - 효자 성이복 정려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98년 - 효자 성이복 정려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99년 - 효자 성이복 정려 중수
문화재 지정 일시 2014년 09월 30일연표보기 - 효자 성이복 정려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0호 지정
현 소재지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와촌리 산93-1 지도보기
원소재지 충청남도 연기군 서면 와촌리 산93-1
성격 정려
양식 팔작지붕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창녕성씨 문중
관리자 창녕성씨 문중
문화재 지정 번호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0호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와촌리에 있는 성이복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개항기에 세운 정려.

[개설]

효자 성이복 정려성이복(成爾復)[1713~1776]의 효행을 후세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남기고자 1891년(고종 28)에 명정을 받아 1892년에 건립되었다. 성이복은 본관이 창녕이고, 자는 양숙(陽叔)이다. 생부는 성석장(成碩章)[1689~1743], 생모는 전의이씨 이태한(李泰漢)의 딸이다. 성이복은 성석장의 네 아들[성이복, 성이곤(成爾坤), 성이덕(成爾德), 성이풍(成爾豊)]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면 와촌리에서 출생하였으나 백부 성규장(成奎章)[1679~1743]에게 출계(出系)[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하였다.

성규장은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으로, 첫 부인은 숙부인 순흥안씨 안성(安誠)의 딸이었으나 일찍 죽었다. 둘째 부인은 숙부인 성주배씨 증참판 배우당(裵佑唐)의 딸[1713~?]이다. 둘째 부인 성주배씨는 양자인 성이복과 동갑으로, 은암마을 효부 부안임씨의 시어머니와 자매 간이기도 하다. 즉 부안임씨의 남편 유언하(兪彦夏)가 성이복의 이종사촌이 되는 셈이다. 성이복은 양아버지가 병이 들자 집 뒤에 단을 쌓고 기도하였으며, 상을 당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거르지 않고 하였다고 한다.

[위치]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와촌리 기와말(지아말) 마을 안쪽으로 약 300m 들어가면 나오는 야트막한 구릉의 배나무 밭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배나무 밭이지만 과거에는 공주와 연기를 잇는 주요 교통로로, 행인들의 출입이 잦은 도로였다고 한다. 현재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변천]

승정원 우부승지를 지낸 이대직(李大稙)이 지은 정려기에 의하면 1890년(고종 27)에 연기 지역의 여러 선비들이 성이복을 조수(鳥獸)도 감동시킨 효자라고 칭찬하면서 충청도 관찰사 송세헌(宋世憲)에게 알리었고, 송세헌이 왕에게 상소하여 1891년(고종 28) 8월에 명정을 받게 되었다. 이에 성이복의 현손인 성재기(成載琪)[1825~?]가 친족들을 독려하여 이듬해인 1892년에 정려를 건립하게 되었다. 그 후 1973년에 군의 보조를 받아 중수되었다.

[형태]

정면·측면 각 1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얹었다. 화강석재를 가공한 8각 고주초석 위에 원주를 올리고, 4면은 홍살을 돌렸다. 하방은 시멘트로 고맥이를 하였다. 정려의 바닥은 시멘트로 보수하였으며, 정려 주변은 철책을 세워 보호하였다.

[현황]

정려 내부에는 명정현판[102㎝×50㎝]이 걸려 있다. 현판에는 ‘孝子通德郞昌寧成公爾復之閭’라고 쓴 후 ‘崇禎紀元後五辛卯八月日命旌 檀紀四千三百六年癸丑三月日重修檀紀四千三百三十一年戊寅四月再重修’라고 기재하여 1891년(고종 28) 8월 효자로 명정을 받은 후 1973년과 1998년에 중수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내부 오른쪽으로 1999년 8월에 한 번 더 중수하였음을 나타내는 중수기[62×54㎝]가 게재되어 있다. 정려 외부 전면에는 이대직이 지은 정려기[84×36㎝]가 있다. 효자 성이복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창녕성씨는 연기 지역에 입향한 이래 성종조에 야인 토벌의 공을 세워 공신녹권을 받은 별시위공 성인산(成仁山)을 비롯하여 비교적 탄탄한 관력을 쌓아 가는 한편, 지역의 주요 가문들과 혼인관계를 맺는 등 유력한 사족가문으로 성장해 간다. 성이복의 효자 정려도 이러한 사족가문으로서의 지위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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