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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943
한자 烈女羅州羅氏旌閭
이칭/별칭 효부 김진창 처 나주나씨 정려
분야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보덕리 133-3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고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76년(숙종 2)연표보기 - 열녀 나주나씨 정려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706년 - 열녀 나주나씨 정려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76년 - 열녀 나주나씨 정려 중수
문화재 지정 일시 2001년 05월 31일연표보기 - 열녀 나주나씨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32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14년 09월 30일연표보기 - 열녀 나주나씨 정려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2호 지정
문화재 해지 일시 2014년 09월 30일연표보기 - 열녀 나주나씨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32호 지정 해지
현 소재지 열녀 나주나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보덕리 133-3 지도보기
원소재지 열녀 나주나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보덕리 133-3
성격 정려
양식 맞배지붕에 홑처마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강릉김씨 문중
관리자 강릉김씨 문중
문화재 지정 번호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2호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보덕리에 있는 김진창의 처 나주나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후기에 세운 정려.

[개설]

열녀 나주나씨 정려강릉김씨 김진창(金震敞)나주나씨(羅州羅氏)의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명정을 받아 건립한 것이다.

나주나씨는 1600년 중반 현종대의 인물로, 나응수(羅應壽)의 딸이다. 나주나씨는 나이가 차자 강릉김씨 김진창에게 시집가서 시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고 남편을 잘 섬기었다.

나주나씨는 남편 김진창이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자 홀로 집안 살림을 떠맡고, 자신이 입고 있던 치마와 긴 머리까지 잘라 팔아 가며 가족의 생계를 이어 나갔다.

시부모가 노환으로 숨지자 3년 시묘를 정성껏 마치고 남편의 뒤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위치]

전동면 소재지에서 남동쪽으로 2㎞ 정도 떨어진 보덕리 보평마을 한가운데에 열녀 나주나씨 정려가 있다.

보덕리보덕리 일대는 김승로(金承露)[1359~1438]의 후손들이 세거하는 강릉김씨 집성촌이다.

[변천]

나주나씨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마을의 사림(士林)[유학을 신봉하는 무리]이 주도하여 효부의 행적을 조정에 알려서 1676년(숙종 2)에 정려 명정을 받게 되었다.

명정을 받은 지 30년이 지난 1706년(숙종 32)에 1차 중수를 하였으며, 그 후의 중수 연혁은 상세하지 않다. 1976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형태]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에 홑처마로 처리하였고, 양 측면의 박공 밑에는 방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화강석재를 가공한 8각 고주초석 위에 원주를 올리고, 4면은 홍살을 돌려 놓았다. 바닥은 시멘트로 보수하였다.

정려 주변에는 기와를 얹은 돌담을 둘렀고, 출입부는 문이 없이 터 놓았다.

[현황]

정려의 내부 중앙 상단부에는 김진창나주나씨의 명정현액[烈婦 通德郞金震敞妻 恭人羅氏之閭, 181×21㎝]이 걸려 있다.

현액 말미에는 ‘崇禎紀元後 丙戌十二月日 命旌 肅廟朝丙辰仲春改立’이라 하여 1706년(숙종 32)에 중수가 이루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열녀 나주나씨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2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나주나씨는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을 대신하여 홀로 자식을 기르고 병든 시부모를 돌아가실 때까지 극진히 봉양하였다.

강한 어머니이자 열녀로 오래도록 후세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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