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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947
한자 李光興孝子閣
이칭/별칭 청원 이광흥 효자각,효자 이광흥 정려각
분야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문곡리 산78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고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91년연표보기 - 이광흥 효자각 건립
이전 시기/일시 2004년 - 이광흥 효자각 이전
개축|증축 시기/일시 1950년 - 이광흥 효자각 중수
문화재 지정 일시 2014년 09월 30일연표보기 - 이광흥 효자각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61호 지정
현 소재지 이광흥 효자각 -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문곡리 산78 지도보기
원소재지 이광흥 효자각 -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 문곡리
성격 정려
양식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경주이씨 문중
관리자 경주이씨 문중
문화재 지정 번호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61호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문곡리에 있는 이광흥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개항기에 세운 정려.

[개설]

이광흥 효자각은 효자 이광흥(李光興)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891년(고종 28)에 세운 정려이다. 이광흥은 경주이씨로, 국당공(菊堂公) 31세 후손이다.

이광흥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효심이 깊어 주위로부터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10살이 되던 해에 부친이 위중해지자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를 소생시키겠다는 의지로 손가락을 잘라 부친의 입에 피를 흘려 넣었고, 부친도 기적과 같이 살아나 3년을 더 살았다고 한다. 부친이 숨지자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면서 슬퍼하고 피눈물을 흘렸다.

또한 모친이 80세가 되어 거동을 못하게 되자 어머니를 등에 업고 이웃집과 친척집에 다니는 등 노모가 적적해 하지 않도록 갖은 정성을 다하여 시중을 들었다.

모친이 노환으로 숨을 거두자 이광흥은 가세가 어려운 형편임에도 3년간 상복을 입고 하루도 빠짐없이 슬퍼하였다.

[위치]

부강면사무소에서 남청주 IC 방면으로 청연로와 부강외천로를 따라 약 5㎞ 가다 보면 문곡교차로가 나온다.

이광흥 효자각은 문곡교차로 변에 있는 식당 옆 소로를 따라 올라가면 소로 왼쪽 구릉지에 서향하여 있다.

[변천]

주민들과 유학들이 이광흥의 효행을 조정에 알려 1891년(고종 28)에 효자로 명정을 받아 정려가 건립되었다. 1950년에 중수하였으며, 2004년에 남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서 현 위치로 이전 중수하였다.

[형태]

정려는 정면·측면 각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 건물이다. 8각 고주초석 위에 원형 기둥을 세웠고, 사면을 홍살로 막았다.

[현황]

정려 밖으로 ‘月城李公孝子門’이라는 효자문 편액을 걸었다. 정려 내부에는 1934년에 심석진(沈奭鎭)이 지은 정려기만 걸려 있다.

이광흥 효자각은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어린 나이에도 부모에게 정성을 다해서 효를 행한 이광흥의 깊은 효심은 타의 모범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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