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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1447
한자 新都市開發-百濟-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선사/선사,고대/삼국 시대/백제,현대/현대
집필자 이홍종

[세종시 건설과정에서 발굴된 다수의 백제유적]

세종특별자치시는 균형있는 국토 개발과 수도권 인구 과밀 해소 등을 위하여 정부 행정 조직 이전을 핵심으로 하는 행정중심복합도시로 건설되었다.

국토 개발은 국민에게 많은 편의성과 혜택을 주지만 한편으로는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국토 개발에 앞서 문화유산을 보호하고자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하여 유적 발굴과 보존에 힘쓰고 있다.

발굴된 유적은 가치에 따라 현지에 보존되거나 이전 보존되는 경우 모두 발굴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세종특별자치시는 금강 유역 중심으로 과거 충청남도 연기군과 공주시, 충청북도 청원군 일대에 건설된 도시로서 개국 이래 최대 규모의 도시에 해당되기 때문에 조사 방법 또한 이전과는 다른 차원에서 진행하였다.

세종특별자치시를 삼분하여 충청문화재연구원,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중앙문화재연구원이 직접 도보 답사를 하면서 육안으로 산지나 구릉지에 산재한 유적의 분포 범위를 확인하는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한편 금강을 사이에 두고 북측에 위치한 장남뜰[현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 및 호수공원 일대]과 남쪽의 대평뜰은 대부분 논으로 경작되고 있어 육안으로는 유물 수습이나 유적의 분포 범위를 확인할 수 없었다. 따라서 두 평야 지역은 개발 이전의 항공사진을 분석하여 퇴적된 지형 양상을 파악하고 유적의 존재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는 고지형분석법을 활용하여 고려대학교 한국고고환경연구소에서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정밀지표조사를 통하여 구석기 이래 전 시대의 유적이 분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백제시대 유적은 한성기와 웅진기로 구분할 수 있다.

세종특별자치시에서 발견된 유적은 대부분 한성기에 속한다. 웅진 천도 이후 세종특별자치시 소재 백제 유적이 급감한 현상은 가까운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이곳의 핵심 세력들이 중앙정부로 진출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금강유역권에서 조사된 웅진 천도 이전 원삼국-백제 시기에 해당되는 유적의 최대 밀집 지역은 금강 중류역에 입지한 세종 지역으로, 미호천 및 금강유역권 최대 중심도시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유적은 성격에 따라 취락 및 생활유적, 분묘유적, 성곽유적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대표적인 취락 및 생활유적은 미호천이 합류하는 맞은편의 산록 및 충적지에 입지한 석삼리, 금강 남안의 자연제방과 배후습지를 이용한 대평뜰, 금강 북안의 단구에 입지한 나성뜰을 들 수 있다.

대표적인 분묘유적은 송담리, 대평리, 나성리, 송원리 등지에서 확인된다. 이 중에서 규모나 위세품으로 보아 금동식리와 과대 등이 출토된 나성리 분구묘는 이미 도굴되어 부장품 성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무덤 축조기법이나 규모면에서 볼 때 송원리 고분군[한솔동 고분군]과 더불어 금강 유역 최상위 무덤으로 추정된다.

한편 취락지 주변에 분묘를 배치한 송담리와 대평리 고분군은 주구토광묘 혹은 분구묘, 수장층과 대비되는 재지민의 무덤으로 각각 중요한 학술적 가치가 있다.

[한성백제기의 지방세력 –한솔동 백제고분군-]

예전의 지명이 송원리이던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한솔동 일대는 세종특별자치시를 개발하면서 첫 번째 마을이 들어선 곳이다.

개발되기 전인 송원리의 지형은 남쪽은 금강과 접하고 북에서 남으로 뻗은 낮은 산지 중심으로 작은 구릉들이 동서 방향으로 이어져 있으면서 동쪽은 금강변을 따라 넓은 충적지[현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 및 호수공원 일대]가 펼쳐져 있었다.

이러한 지형은 충적지의 농경은 물론 하천을 이용한 물류 및 교통 입지 최적 조건을 갖추었다. 실제 청동기시대 주거지 58기와 지석묘 2기도 발굴되어 선사시대부터 인간의 터전이었음이 증명되었다.

백제시대에는 송원리 지역에 대한 이용이 더욱 확대되어 금강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도시 유적인 나성리 유적이 건설되었고, 이들 집단에 의하여 바로 한솔동 고분군이 조영된 것이었다.

현재 유적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는 한솔동 고분군은 발굴 당시 석실분 17기, 석곽묘 20기, (주구)토광묘 39기, 옹관묘 6기가 조사되었다. 북동쪽으로 인접한 송담리고분군이 주로 (주구)토광묘, 석곽묘, 옹관묘 등 원삼국시대 이래 토착성 강한 무덤임에 비하여 한솔동 고분군은 대규모 석실분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고분군 내에서의 위계화가 뚜렷하게 관찰된다.

한솔동 석실분 중에서 특히 16호분이 주목된다. 구릉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 다른 일반 석실분들과는 규모나 축조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연도(羨道)[고분의 입구에서 시체를 안치한 방까지 이르는 길]가 중앙에 위치한 지하식의 횡혈식석실묘로, 천장부는 도굴에 의하여 이미 훼손되어 원형을 알 수 없지만 묘광(墓壙)[무덤 칸이나 곽 또는 관을 넣기 위하여 판 구덩이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넓어지게 굴착(掘鑿)[땅이나 암석 따위를 파고 뚫음]한 형태로 보아 궁륭상(穹窿狀)[활이나 무지개같이 한가운데가 높고 길게 굽은 형상]의 천장 구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묘광 크기는 길이 446㎝, 폭 485㎝, 깊이 330㎝로 거의 방형에 가깝다. 묘실은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한 말각방형이며, 11단까지는 수직으로 쌓았다. 그 위로는 안으로 기울여 쌓아 천장부가 좁아지게 만든 형태로 벽석은 매우 촘촘하며, 틈새는 작은 돌이나 점토로 보강하여 매우 치밀하게 축조하였다.

무덤으로 들어가는 길은 지표면에서 25° 경사의 490㎝와 폭 193㎝의 묘도를 만들고, 다시 수평으로 묘실로 들어가는 길이 330㎝와 폭 109㎝ 및 높이 180㎝의 연도부를 만들었다.

이러한 무덤 형태는 우리나라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로, 마치 중국 남북조시대의 전축분과 유사하여 무덤 주인공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위상과 역할을 보여 주고 있다.

출토유물은 도굴로 인하여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인골 및 말의 하악골을 비롯하여 각종 토기류, 금동장신구, 등자(鐙子)[말을 타고 앉아 두 발로 디디게 되어 있는 물건], 곡옥(曲玉)[옥을 반달 모양으로 다듬어 끈에 꿰어서 장식으로 쓰던 구슬], 구슬 등이 다량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금강 유역 최고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한솔동 고분군은 금강 유역에서 최초로 고대도시를 만들고 이 지역을 지배한 집단의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지방세력의 연합과 거점도시의 형성 –나성리 도시유적-]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리의 금강 하안단구에서 기존의 주거지 구조나 배치 형태와는 전혀 다른 한성 백제기의 취락이 발견되었다. 나성리 유적에서 거주 시설, 수장저택, 지배층 무덤, 제의시설, 경제와 여가 활동을 위한 시설, 도로 및 선착장, 대규모 물류집하시설, 빙고 등 공적 공간 시설물 등이 모두 발견되었다.

세종특별자치시를 동에서 서로 관통하는 금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는 장남뜰[나성 동쪽]과 나성뜰[나성 서쪽]이, 남쪽에는 대평뜰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북쪽과 남쪽 두 지역은 세종특별자치시가 개발되기 이전에는 대부분 논 경작지였지만 지형 조건은 서로 달라서 북쪽의 나성뜰과 장남뜰은 커다란 단구(段丘)[하안(河岸)이나 해안 또는 호안(湖岸)을 따라 형성된 계단 모양의 지형] 지형에 속하고, 남쪽의 대평뜰은 범람과 퇴적이 반복되면서 형성된 자연제방과 구하도(舊河道)[예전에는 하천이었으나 현재는 물이 흐르지 않고 하천 흔적만 남아 있는 지형] 및 배후습지가 어우러진 범람원(汎濫源)[홍수 때 강물이 평상시의 물길에서 넘쳐 범람하는 범위의 평야] 지형에 속한다. 이러한 지형은 당시의 토지 이용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남쪽의 대평뜰은 선사시대부터 정착하기 시작하여 자연제방은 취락지와 무덤, 구하도나 배후습지는 논이나 밭의 경작지로 이용되었다. 북쪽은 단구 형성 시기에 따라 구석기유적부터 백제·조선시대 유적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거주 영역으로 이용되었다. 나성리 유적은 현재의 나성 서쪽 금강과 접한 단구상에 동서 약 600m, 남북 약 900m의 방형 형태로 계획된 금강 유역 최초 및 최고(最古)의 도시유적이다.

나성리 유적 조성은 마치 현재의 계획도시를 건설하는 것과 같이 도로를 기반으로 하되 전체적인 지형 경관을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다.

현재의 조천에서 나성 서쪽으로 물줄기를 끌어들여 취락 중앙부에 형성된 곡부상의 낮은 지점에 물이 모였다가 빠져나갈 수 있는 호수를 조성하고 나성과의 사이에는 해자(垓子)[성 주위에 둘러 판 못]를 만들어 유사시를 대비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도로는 금강에서 시작하여 중앙 호수를 사이에 두고 동쪽도로와 서쪽도로로 나누인다. 동쪽도로 주변으로는 창고군이 배치되고 창고군의 북쪽 끝에 수장(首長)[어떤 집단이나 단체를 지배하고 통솔하는 사람] 저택이 위치하고 있다. 서쪽도로 주변으로는 누각 형태의 건물지가 배치되어 있고, 도로는 북쪽 끝에 자리한 제단시설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성리 유적의 시설 및 출토유물은 도로, 선착장, 도로를 따라 배치된 누각 형태의 가옥, 고상창고군의 집중화, 저장 및 이동용의 대형 토기 가마군, 빙고, 제단시설, 수장층의 저택, 취락 중앙부 호수의 배치, 배후 토성, 위계화된 고분군, 교역품으로서의 금동제 부장품 및 요고(腰鼓)[국악에서 쓰는 타악기의 하나] 출토 등 매우 다양하다.

초기 고대 도시 성립의 주요 조건은 취락과 인구 밀집, 1·2차 생업시스템 분리, 유통과 교역, 중앙 권위에 의한 경제적 잉여 전유, 사회적 계층화의 발달 등이 언급되고 있다. 나성리 유적은 이들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고 있어 초기 도시유적이라 부를 수 있다.

나성리 유적 성립은 대평리 등 남쪽 평야지역을 배경으로 오랜 기간 존속된 독자적인 농경 취락들이 연합해서 이 지역의 대외적·정치적·경제적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건설한 최초의 도시로, 백제가 공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 금강 유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묘제나 출토 유물 등으로 보아도 중국 및 한성백제와의 교역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의 원삼국 및 백제시대의 유적들 –원삼국 및 백제시대의 유적들-]

세종특별자치시 조사 과정에서 발굴된 유적 중 나성리 도시유적이 핵심 유적이지만 이 밖에도 원삼국-백제 시기 유적이 상당수 조사되었다.

이들 유적은 원삼국-백제시대 세종 지역이 성장하여 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으며, 나아가 나성리 도시유적을 성립시키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유적 중에서 나성리 도시유적을 성장시키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 유적들의 입지는 크게 송담리·나성리·한솔동을 잇는 금강 북쪽권역, 대평리·석삼리의 금강 남쪽권역, 용호리·합강리·월산리로 대표되는 미호천권역 등 3개 권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금강 북쪽 권역의 송담리 유적은 전월산과 원수봉에서 남서쪽으로 뻗어내린 여러 갈래의 나지막한 구릉에서 (주구)토광묘 50기, 석실분 1기, 석곽묘 6기, 옹관묘 7기가 조사되었다. 이들 분묘는 원삼국시기 세종 지역에서 확인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유적에 속한다.

금강 남쪽 권역의 나성리와 마주하고 있는 대평리 유적은 금강의 퇴적과 범람으로 형성된 자연제방 상에 100여 기의 주거지·저장시설·고상창고(高床倉庫)[습기나 짐승의 습격을 피하여 평지보다 높게 지은 창고]·함정 등을 배치한 대규모 취락시설이 입지하고 배후습지에는 농경지[수전, 밭] 그리고 자연제방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150여 기의 (주구)토광묘 분묘군이 자리하고 있는 대단위 복합유적으로, 원삼국-백제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또한 이곳 자연제방에서는 기원전 12세기 청동기시대 초기의 대규모 취락과 청동기인이 만든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수전(水田)[물을 쉽게 댈 수 있는 무논] 유적도 함께 조사되었다.

석삼리 유적은 대평뜰의 동쪽 끝에 위치한다. 구릉에서는 (주구)토광묘, 석곽묘, 옹관묘, 석실분 등 120개 이상의 고분이 조사되었다.

한편 취락은 충적지와 구릉 사이의 산록에 입지하고 있다. 일반적인 수혈주거지가 아니라 도랑을 두른 소위 주구부건물지로, 나성리 도시유적에서 보이는 누각식에 가까운 구조이다. 따라서 이 일대는 대평리와 구분되는 독립성 강한 또 다른 대규모 취락이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금강과 합류하는 미호천의 양안은 서쪽은 비교적 낮은 구릉, 동쪽은 산지로 각각 이루어져 있다. 용호리 유적은 미호천 동쪽으로 60m 높이의 산지에 위치한다.

용호리 유적에서는 원삼국시대 주거지 10기, 주구토광묘 43기, 옹관묘 4기, 백제시대 토기가마, 토광묘 등이 조사되었다.

미호천금강과 합류하는 동쪽 산지에 입지한 합강리 유적에서는 원삼국시대 주거지 10기, 토기가마 11기를 비롯하여 백제시대 토광묘를 비롯한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었다.

월산리 유적은 미호천 서쪽 35m 정도의 낮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으며, 3~5세기 원삼국-백제시대 주거지 2기와 저장용 구덩이 120기가 집중해 있다. 월산리 유적처럼 저장용 구덩이가 밀집되어 축조된 것은 매우 드문 예로, 월산리 유적의 지리적 환경과 관련이 매우 깊은 것으로 보인다.

월산리 유적은 금강미호천이 모두 조망되는 지형이면서 지질 또한 풍화암반토로서 지하 저장시설로는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미호천의 수계를 이용하여 다양한 농산물을 집하하고 저장한 장소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이를 미루어 세종 지역 일대는 대규모 물자집하와 관리를 담당할 수 있는 조직체가 원삼국 단계부터 서서히 등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백제시대의 세종시 지역의 위상 –세종시 백제유적의 역사적 의의]

금강을 둘러싸고 행정중심복합도시가 건설되면서 지하에 매장되어 있던 수많은 문화재가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특히 지표조사 단계부터 관계 전문가의 철저한 계획하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매장문화재가 빠짐없이 조사된,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발굴이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세종 지역의 전반적인 문화상뿐만 아니라 타 지역과의 네트워크 등 역사 전반을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세종 지역에서는 구석기 및 신석기 유적도 일부 확인되었지만 본격적인 역사의 시작은 청동기시대부터이다.

청동기시대는 논의 구획 등 완비된 수전 체계가 정비되면서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이를 통하여 정착농경생활이 가능해진 시기이다.

우리나라에서 수전농경에 의한 벼농사의 개시는 중국 황하강 유역의 용산문화가 요동을 거쳐 한반도로 진출하면서부터로, 덧띠무늬토기[돌대문토기(突帶文土器)]라 불리는 청동기시대 전기 토기집단이 주인공이다.

덧띠무늬토기문화는 기원전 15세기경 처음 한반도로 유입되어 강원도를 포함한 한강유역권, 호서 지역의 금강유역권, 호남 지역과 영남 지역에 분포하다가 기원전 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일본으로 이주하여 수렵채집의 조몬문화를 종식시키고 수전농경을 바탕으로 하는 야요이문화를 탄생시킨다.

기원전 14~10세기에 해당하는 세종 대평리 유적은 자연제방 위에 주거지 70기를 비롯한 목책열(木柵列)[기둥구덩열] 등을 배치하고, 그 아래 개석(開析)[하천의 침식작용으로 평지에 골짜기를 만드는 현상]된 구하도(舊河道)[예전에는 하천이었으나 현재는 물이 흐르지 않고 하천의 흔적만 남아 있는 지형]에 한반도 최초로 수전을 조영(造營)[집 등을 지음]한 이 시기 최대 규모의 취락에 속한다.

이처럼 세종 지역은 청동기시대부터 농경문화 중심지로 자리하기 시작하여 지리적·문화적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된다.

백제 이전 농경문화의 최대 정착지인 세종 지역은 한성백제기 금강 유역 최초이자 최대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물론 그 배경에는 청동기시대부터 이어져 온 활발한 농경 활동을 기반으로 성장하면서 금강 수계권의 지리적 중심지로서의 자연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삼국 단계의 세종 지역은 대평리 유적과 석삼리 유적 등에서 보듯이 평야 지역 중심으로 농경인구 집중화가 이루어지고, 월산리 유적과 같이 미호천 등 주변 지역의 물류집하를 담당하는 등 다른 지역과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러한 차별성이 결국 한성백제기에 접어들면서 세종 지역이 금강 유역 중심지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하여 나성리 유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금강 유역 최초로 고대도시가 탄생하게 되었다.

나성리 고대도시를 지배한 계층은 처음에는 단구상의 미고지(微高地)[가는 모래가 두껍게 퇴적된 지형]에 무덤을 설치하다가 차츰 서쪽의 구릉에 그들만의 거대 석실분을 만들게 된다.

이 중에서 한솔동에 입지한 16호분은 다른 석실분과 다르게 지하식 석실분이면서 축조 방법이 중국의 남조양식과 유사하다. 또한 이들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도굴로 인하여 소실된 점을 감안하더라도 금동성시구, 금동관대, 금동구슬, 금동장신구, 은제반지, 청동신발 등은 한성백제와 관련 깊은 위세품(威勢品)[왕이 지방세력 수장에게 힘을 과시하는 한편 세력권에 편입시키면서 지방에 있는 수장의 위신을 세워 주기 위하여 하사하는 귀한 물품]이다.

결국 나성리 도시유적은 백제가 공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 금강유역권을 다스린 세력으로, 한성백제는 물론 중국과도 교역하면서 영역을 구축한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의 공주 천도 이후에는 세종특별자치시 유적도 거의 소멸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는 백제 중앙정부의 중추적인 세력으로 편입되었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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