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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1448
한자 盤谷里-文化
영어공식명칭 The Life and Culture of the People of Bangokri
분야 역사/전통 시대,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반곡동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김호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2년 7월 - 세종특별자치시 출범으로 반곡리는 반곡동과 연기면 세종리에 편입·분리됨

[개설]

금강 중류에 위치한 반곡리는 여양진씨 중심으로 경주김씨, 의성김씨 등 130여 호가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2005년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특별법에 따라 2006년부터 2009년까지 반곡리 주민들은 인근 또는 대전·공주·조치원 등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2012년 7월 세종특별자치시 출범 후 반곡리는 인근의 석삼·장재·반곡·봉기·석교·황용리 일부와 합쳐져 반곡동이 되고 일부는 연기면 세종리에 편입되었다.

반곡리 주민 중 일부는 대평동, 나성동, 종촌동, 도담동 등 지역으로 돌아와 거주하고 있다.

[지리적 위치와 생업]

반곡리는 남쪽의 괴화산을 뒤로 하고 북쪽의 금강을 마주보는 배산임수 입지를 갖추고 있어 방향상 북향을 하고 있다.

삼성천이 마을 옆에서 앞뜰을 휘돌아 금강으로 합류하는 곳에는 마을의 주요 농지인 여수배들과 큰개들, 번제들, 구레들 등이 분포한다.

괴화산의 둘레에 석교리· 황용리·장재리·석삼리가 이웃하고 있고, 금강 너머로는 전월산의 양쪽 끝에 각각 양화리와 월산리가 있다.

양화리반곡리 사이 금강에는 양쪽 마을을 잇는 앵챙이나루가 있었다.

주민들은 평소에 일이 있으면 소리쳐서 사공을 불러 배를 이용하였고, 사공은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집집마다 다니면서 형편에 따라 보리나 벼를 거두어 갔다고 한다.

반곡리는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였지만 축산업, 회사원, 자영업 등 종사자가 일부 있었다. 회사원은 금강 주변에 있는 골재 채취 및 레미콘 공장과 관계가 있었다.

대부분의 농가가 논농사와 밭농사를 겸하고 있고, 벼·콩·고추·깨 등 전통적인 작물 이외에도 수박과 단무지를 만드는 무 같은 판매용 작물을 경작하였다.

금강변 넓은 땅의 이점을 활용하여 잔디를 심어 정원용과 산소 조경용으로 판매하는 농가도 있었다.

[역사]

반곡리의 주요 성씨는 여양진씨, 경주김씨, 의성김씨이다.

주요 성씨들의 입향조 전설을 보면 대략 조선 중반쯤 각종 사화와 임진왜란 등 정치적 사건 및 전란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기 때 반곡리에 정착하였음을 유추하여 볼 수 있다.

여양진씨반곡리 입향조 진한번(陳漢藩)의 부친인 집의공 진우(陳宇)가 1535년[중종 30년] 김안로의 모함으로 희생된 후 아들 넷 중 둘째인 진한번이 반곡리에 들어와 세칭 ‘반곡진씨’ 세거지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경주김씨 입향조는 조선 선조 때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지낸 김논(金論)과 공인(恭人)[조선 시대에 정오품 및 종오품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던 외명부의 품계] 진주강씨(晉州姜氏)다.

김논은 임진왜란 중 전장에서 전사한 후 김논의 처 진주강씨가 청주 남일면에서 난을 피하여 들어왔다고 전한다.

의성김씨는 양소공 김영열의 9세손인 절충장군 김계윤(金啓胤)의 손자 김덕명(金德明)이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하여 반곡에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반곡리 여양진씨 족보를 보면 반곡리 정착 후 후손이 번성하기 시작한 것은 입향조로부터 대략 5~6대가 지난 17세기 중반 이후에 들어서다.

14세손 진한번[1526~1572] 이후 18세손 진상은(陳相殷)[1637~1677]·진상한(陳相韓)[1642~1732] 형제가 각각 세 아들을 두어 6계파를 형성하였다. 진상은은 진선옥(陳善玉)·진선발(陳善發)·진선환(陳善煥)을 두었고, 진상한은 진우주(陳愚周)·진현주(陳賢周)·진철주(陳哲周)를 두었다.

반곡리는 6계파 중에서도 진선발과 진우주 두 계파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2005년 당시 반곡리의 성씨별 인구 구성을 보면 여양진씨가 62%, 경주김씨의성김씨가 약 27%, 나머지 성씨가 10% 남짓을 차지하고 있었다.

의성김씨는 “10호가 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10호가 넘으면 이사를 가든지 한다”는 말이 지금도 전한다.

[반곡리 고문서]

여양진씨 진병갑·진병돈 형제는 문중에서 전하여 내려오는 고문서 450여 점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기증 문서 중에서 조선시대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반곡리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중요 문서 세 가지가 대표적이다.

첫째 1794년에 작성된 『반곡식목서(盤谷植木序)』다. 문장을 직접 쓴 사람은 성회재주(成悔齋主) 성호(成灝)[1764~1834]이다. 전체 1,301자의 내용은 반곡리 수구(水口)[물을 끌어들이거나 흘려 내보내는 곳]의 식목(植木)에 관한 논설을 담고 있다. 하천 바닥을 정리하고 제방 주위에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하여야 하는 이유를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문답식으로 썼다. 마지막 부분에는 수구의 숲을 보호하고 관리하기 위한 다섯 가지 절목(節目)을 달았다. 5개 절목은 보호 지역·대상, 규칙의 집행자·집행방식, 징벌방식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는 일종의 향약이다.

둘째 위정 진시책(陳時策)[1831~1906]의 문집 『위정집(葳汀集)』이다. 간찰(簡札)[편지]을 묶은 의편(義編), 단자(單子)[부조나 선물 등의 내용을 적은 종이]·통문(通文)[여러 사람의 성명을 적어 차례대로 돌려 보는 통지문]·기문(記文)[기록한 문서] 등을 모은 예편(禮編), 여러 편의 위정집에서 중요한 것만 뽑아 엮은 약초편(略抄編) 등이 있다. 진시책은 어려서부터 경서(經書)와 역학(易學)에 밝았고, 1867년에는 면(面)의 천거(薦擧)[어떤 일을 맡아 할 수 있는 사람을 그 자리에 쓰도록 소개하거나 추천함]로 공주 명탄면(鳴灘面) 영유창(永裕倉)의 사수(事首)로 임명되어 사창(社倉)[조선 시대에 각 고을의 환곡(還穀)을 저장하여 두던 곳집] 일을 보았다. 개항기 문신 서상우(徐相雨)[1831~1903]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1901년 그를 고종황제에게 천거하였다. 1902년 재차 소명 때 조정에서 찬성(贊成)이라는 벼슬을 제수하였음에도 진시책이 관직을 사양하자 고종황제가 진시책의 지조를 가상히 여겨 이름을 부르지 않고 ‘처사(處士)’라 호칭하였다고 한다. 1903년에는 고종황제의 칙명(勅命)으로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고 횡성(橫城)으로 나갔다가 갑진년[1904]에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고종황제가 국운에 대하여 묻자 배국록(排局錄)이란 소책자를 지어 올렸고, 국운을 부흥시키는 방법으로 학문과 치세(治世)의 근원인 기자묘(箕子廟)를 건립하도록 황제에게 청하였다. 한편 마을에는 화산정사(華山精舍)와 일행정(一幸亭)이라는 서당과 정자를 지어 후손 교육에 힘썼다. 『위정집』에는 지역 사람들과의 간찰을 통한 교류, 문중 중요 사역(事役) 현황, 지역의 중요 장소와 일에 관한 기록 등 개항기 반곡리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소중한 정보를 담고 있다.

셋째 진세현(陳世顯)[1854~1928]의 문집 『화잠소창(華岑消唱)』이다. 진세현은 진시책의 아들이다. 한학에도 조예가 깊은 진세현은 비록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부친인 위정 진시책과 마찬가지로 학문적인 성취가 있었다. 일례로 『화잠소창』에는 7언 율시 13수로 구성된 한시(漢詩) 「태양십이경(太陽十二景)」이 실려 있다. 「태양십이경」반곡리를 중심으로 부강에서 나성리까지 이르는 금강 중류 지역의 주변 경관을 묘사한 12수와 12경을 종합한 1수로 구성되어 있다. 「태양십이경」은 저자가 “운을 맞추고, 시적 경치를 구성하고, 뜻을 표현하기 위하여 관련 전고나 낱말을 고르고 문장을 짜는 데 있어 깊은 조예를 보여주고” 있으며, “현지의 지명을 소재로 가장 특색 있는 경치를 선정하여 훌륭한 문채로 세밀하게 묘사”하는 등 문학적인 측면에서 높은 성취를 이루고 있다.

[사회조직]

반곡리의 전통적인 사회조직은 지연(地緣)이 기초가 된 마을 단위 조직과 혈연(血緣)을 기본으로 하는 친족 단위 조직으로 나눌 수 있다.

마을 단위 조직에는 마을회·노인회·청년회·연반계·뜸계 등이 있다. 마을회는 매년 정월에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긴급하고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는 임시총회를 개최한다. 정기총회에서는 전년도 회계결산과 함께 이장 선출, 마을 공동재산인 동답(洞畓)의 경작자 결정, 공동 현안 등을 논의한다. 동답은 대개 소유하고 있는 토지가 없거나 적은 사람들에게 경작하도록 배려하였다. 반곡리는 큰 마을이라서 골말, 웃말, 가운뎃말, 안산, 뒷메, 아랫말, 재께 등 7개의 뜸[‘반’과 같은 의미]으로 구성되어 있다. ‘뜸’을 단위로 하는 계도 있다. 마을에 상사(喪事)가 있을 때 상여를 메는 연반계는 대·소 연반계로 구분된다. 대연반계는 세대주가 장남인 사람들로 구성되고, 소연반계는 대연반계 혜택을 받지 못하는 차남 이하 지손(支孫)들로 구성된다.

친족 단위 조직에는 대표적으로 대종계가 있다. 여양진씨의 경우 대종계 역사를 보여 주는 자료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1909년의 『태양진씨 대종계서(太陽陳氏大宗稧序)』로, “병오년[1906]에 종중의 전답이 홍수에 파괴되었다. 1가구당 6되의 쌀을 거두어 둑을 쌓았고 납탑골[納塔谷] 위의 큰 산소 주위의 소나무와 가래나무를 팔아서 수십 금(金)을 만들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계를 통하여 자연재해를 함께 극복하고자 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1954년에 작성된 『여양진씨 대사헌공 대종계(驪陽陳氏大司憲公大宗稧)』로, 문서는 서문-계칙-부칙-임원구성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대종계는 입향조부터 아래 4대에 이르기까지의 조상을 모시고 있다. 주로 음력 10월 15일의 대산소 시제를 합동으로 지내지만 사정에 따라 동짓달에서 섣달 사이의 적당한 날짜를 택하여 계회를 개최하였다. 대종계의 재산은 위토(位土)[묘에서 지내는 제사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경작하던 논밭]와 임야로 구성되어 있다. 1960년대에는 서울대학교·연세대학교·고려대학교 진학생으로 한정된 ‘장학회 사업’을 하기도 하였다. 경주김씨 대종계는 21세(世)인 ‘한(漢)’자 항렬 기준의 23계파로 구성되어 있다. 매년 개최되는 대종회에서 23계파의 대표가 발언권을 갖고 있다. 그런데 17세손 김선익(金善益), 김정익(金鼎益), 김광익(金光益), 김귀익(金貴益) 중 둘째 김정익의 후손이 무려 17계파를 갖고 있고 전체 자손 통계에서도 90.4%를 차지하고 있다. 즉 종손보다 차손의 후손이 월등히 많은 특징을 보이고 있다.

[민속신앙]

반곡리에서 주목할 만한 민속신앙으로 가신(家神)과 산신(山神)이 있다.

먼저 가신에는 삼신, 성주, 터주 등이 있다.

아이들의 출산과 육아를 담당하는 삼신의 구체적 형태는 김명호 집에서 보이는 삼신전대다. 매년 음력 10월 초하룻날 전대[무명이나 베로 폭이 좁고 길게 만든 자루] 속에 한 되가량의 햅쌀을 넣고 삼신전대 위에 미역을 얹어 놓는다. 아기를 낳으면 전대 밑에 짚을 깔고 첫 국밥[밥, 미역국, 물]을 놓았다가 산모가 먹는다. 아기를 낳고 3일째 되는 날 짚, 태, 왕겨를 태운다. 이를 삼불이라 한다. 재는 살아있는 과일나무에 뿌린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생일을 맞으면 전대에 미역국을 끓여다 놓는다. 반곡리 옛말에 “아들두 못 낳구 딸만 낳은 사람이 홧대[횃대] 밑구녕[아래]에서 미역국만 후질후질 잘만 먹더라”는 말이 있는데 아들 못 낳고 딸을 낳은 사람이 미역국은 챙겨 먹는 것을 빗댄 것이다. 아들을 선호하는 구시대적 관념이 나타나 있는 말이다.

성주는 집안의 평안과 가족의 건강을 돌보는 신으로, 가신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신이다. ‘성주 받는다’고 하는데 택일을 하여 만신[여자 무당을 높여 이르는 말]이 경을 읽고 대잡이[무당이 신탁을 받을 때 대를 잡는 사람]가 대를 잡아 받는다. 종이를 오려 연꽃 모양으로 만들고 안에 나무와 쌀을 넣은 후 대들보가 있는 방 안에 달아 놓는다. 안에 넣는 나무는 과일나무로, 대개 자기 집에 있는 감나무 또는 대추나무 가지를 사용하는데 동쪽으로 난 가지를 꺾어 와서 잘게 잘라 3개를 만들어 넣는다. 쌀은 ‘불배키쌀’이라 하는, 경을 읽을 때 촛불 켜 놓는 떡시루에 담아 놓는 쌀이다. 도막 난 쌀은 가려내고 온전한 쌀을 써야 한다.

터주는 대개 장독대에 있으며, 터주단지와 터주가리로 나뉜다. 터주단지에는 매년 음력 10월 초하룻날 햇벼를 넣고 매달 초사흗날 떡을 하여 촛불을 밝히고 청수도 떠다 놓는다. 음력 10월 초하룻날을 잡는 이유는 마을에서 산신제를 지내기 때문에 깨끗한 날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터주가리는 추수하고 난 후 새 짚을 가져다가 만들고, 터주가리를 묶는 새끼줄은 금줄과 마찬가지로 왼새끼를 사용한다.

반곡리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초하룻날 산신제를 지낸다. 산신당은 마을 뒤편 괴화산 중턱에 있다. 괴화산 둘레에 있는 석교리·장재리·석삼리 주민들도 괴화산 자락에 있는 각각의 산신당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마을에서는 산신제를 지내기 열흘 전쯤 우환과 부정(不淨)이 없는 집 중에서 제관[고양주·축관]을 선정한다. 그러나 제관 선정이 쉽지 않아 마을 이장이 대신하기도 한다. 제관으로 선정되면 집 주위에 금줄을 치고, 제관은 비린 것을 먹거나 흉한 것을 보아서는 안 된다. 산신제의 가장 중요한 제물(祭物)은 돼지이다. 흰털이 없는 흑돼지여야 한다. 대개 통돼지를 사용하지만 형편에 따라 돼지머리나 쇠머리를 사용하기도 한다. 제의는 해가 지는 오후부터 시작하여 새벽에 끝난다. 순서는 제물 진설-분향-재배-소지올리기-독축 과정으로 진행된다. 제의가 끝나면 10월 초이튿날 아침에 마을회관에 모여 마을잔치를 벌인다.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빌면서 한편으로는 마을사람들의 단합과 결속을 다지는 기능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반곡리 산신제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지내 올 정도로 중요한 마을제의였지만 마을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제사 주체의 해체와 마을 소멸로 인하여 2007년부터 전승이 중단되었다.

[세종특별자치시 개발과 이주]

노무현 참여정부의 국토 균형발전전략에 의하여 2005년 3월 2일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공주 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이 의결되면서 도시 건설지역에 포함된 반곡리 주민들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보상을 받고 이주하였다. 정부의 보상은 분명 당시 해당 지역의 수준보다 높았지만 누대에 걸쳐 살아온 터전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은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주민의 절반 이상이 수용 지역 내에 포함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반대 의사를 적극 표현하지는 않았다.

2005년 12월 20일 보상이 시작됨에 따라 반곡리 주민들은 2006년부터 2009년까지 비교적 빠른 시기에 이주를 완료하였다. 주민들은 이주에 앞서 고려한 여러 가지 조건[경제적 조건, 이웃, 가족, 생활성향 등]을 가장 많이 충족시킬 수 있는 ‘고향’을 택하였다. 2015년에 조사 대상 전체 75가구 중 세종특별자치시 관내로 이주한 가구는 57가구로 전체의 76%에 달하였고, 이주 가구 중 43가구가 금남면에 정착하였다. 특히 면소재지가 있던 용포리[현 대평동]로의 이주 비율이 높았다.

세종특별자치시 도시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2012년 이후 반곡리 이주민 중 일부는 세종특별자치시에 새로 들어선 아파트로 재이주하였다. 이주민을 위한 아파트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영구임대주택이고, 다른 하나는 이주자 택지 혜택을 활용하여 지은 이주민아파트다. 2012년 10월 이주민을 위하여 건립한 총 500호의 영구임대주택인 행복아파트 입주가 시작되었고, 2014년 4월에는 세종특별자치시 최초의 이주민조합아파트[가재마을 9단지 한신 휴플러스] 입주가 이루어졌다.

세종특별자치시 내에 주거지가 새롭게 조성되면서 2차 혹은 3차 이주를 통하여 이주민들이 되돌아오는 경향이 생겼다. 반곡리의 경우 2015년 당시 재이주한 30가구 중 16가구가 세종특별자치시로 들어왔다. 이주민이 돌아오는 경향은 2차 이주민아파트조합에서 건설한 대평동의 아파트가 2019년 입주를 시작하면서 더욱 증가하였다.

[이주 후의 변화]

반곡리 마을회는 이주와 함께 마을이라는 기반이 없어지면서 완전히 해체되었다. 마을회는 마을 공동재산에 대한 보상액 전체를 마을 거주 50년 기간의 여부에 따라 차등 지급하기로 결정하였다. 지급 과정에서 공동재산을 남겨놓자는 의견도 없었고 보상액을 적게 분배받은 사람들의 불만도 쌓이면서 이주 후에도 마을회가 유지될 수 있는 마을 전체 규모의 모임을 만들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양화2리 가학동의 사례처럼 마을재산이나 기금을 별도로 마련하여 놓은 마을에서는 이주 이후에도 마을 단위의 모임을 지속하고 있는 곳도 있다. 지연적 기초와 아울러 공동재산 및 주민 단합이 마을회의 존속에 필수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혈연조직은 마을을 기반으로 하지만 딸린 재산이 있고 구성원의 숭조(崇祖) 관념이 강해서 이주에 따른 마을 해체에도 당장 해체되지는 않는다. 이주 후 여양진씨 대종계는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에 임야를 구입하여 대종중 묘지를 이전하였다. 묘지를 관리하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부근에 위토를 구입하고 남은 돈은 소종중 별로 분배하였다.

위토 외에 남겨 놓은 현금이 얼마 되지 않아 현재 대종중은 하여야 할 일에 비하여 자금이 부족하다. 대종회 명의로 여러 가지 사업을 할 때마다 각 계파에 모금하고, 심지어 종중 일을 하는데 소요되는 교통비나 식비도 자비로 충당하고 있다. 매년 대종중 묘역에서 지내는 세일사(歲一祀)[음력 10월에 5대 이상의 조상 무덤에 지내는 제사]는 참여하는 종원(宗員)의 수에 큰 변화는 없지만 제의 종료 후 식당을 빌려 잠시 회의하고 서둘러 밥만 먹고 헤어지는 상황이 되었다.

2006년 보상 이후에도 한동안은 음력 설이 지난 후 2월 중에 적당한 날짜를 잡아 대종계를 개최하였지만 2015년부터는 양력 3월 1일 공휴일로 날짜를 지정하였다. 반곡리 경주김씨 대종계도 양력 3월 1일로 지정한 것을 볼 때 전통적인 사회의 농업 주기가 아니라 현대 사회의 공휴일 제도에 궤를 맞추고 있는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마을 기반이 해체된 상황에서 혈연 단위의 종계 조직은 이주로 인하여 해체된 마을 주민들이 서로 만나고 교류하고 단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혈연조직 외에 이주 후에도 지속되고 있는 반곡리 주민 간 모임은 연령별이나 성별 계모임이다. 마을 조직은 구성원이면 참여하여야 하는 의무인 반면에 성별 혹은 연령별 모임은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자발적으로 만들어 친목을 도모하기 때문에 결속력이 훨씬 강한 편이다. 2015년 조사 당시에도 지속되고 있는 남성 모임은 본동회와 반곡향우회가 있었다. 본동회는 본래 청년회 성격의 본동계이다. 반곡향우회는 중노당계[청년회와 노인회의 중간 연령대 모임]이다.

여성 모임으로는 좋은 친구와 반곡친목계가 있다. 좋은 친구는 부녀회 및 같은 반을 연고지로 하는 뜸계가 기초가 되어 만들어진 모임이고, 반곡친목계는 여양진씨 이외의 기타 성씨 집안의 부녀자들이 만든 모임이다.

주민 간 모임은 이주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모여 옛날 함께 고생한 시절과 반곡리 마을 이야기나 새로운 정착지와 이주 이후의 변화 등을 화제로 삼아 고향을 떠난 아쉬움을 서로 토로하고 위로하며 새로운 정보도 교류하는 등의 기능을 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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