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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시 세종의 역사와 관광자원으로서 ‘산성’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1453
한자 新都市世宗-歷史-觀光資源-山城
분야 지리/인문 지리,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백영종

[세종특별자치시의 자연환경적인 입지]

2012년 7월 1일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하면서 세종시 이름만으로의 역사적 변천은 불과 7년에 지나지 않는다. 세종특별자치시 이전의 명칭인 충청남도 연기군은 이제 점차 잊혀지게 되었지만 과거 연기군은 선사시대를 거쳐 역사시대로 이어지면서 오랫동안 사람들이 영위해 온 장소였음이 분명하다. 이는 연기군 일대의 자연지리적인 요인 덕분에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입지였기 때문이다.

세종특별자치시에는 금강이라는 큰 하천이 흐르고 있으며, 여기에 미호천·조천 등 지류 하천이 금강에 합수되고 있다. 미호천 주변의 넓은 충적평야는 경작하기에 비옥한 대지를 제공하였고, 주변의 낮은 구릉지는 주거 공간을 마련하여 주었다. 북쪽의 차령산맥으로 형성된 높은 산지는 산성을 축성하여 적을 방어할 수 있는 천연의 자연막이 되었다. 남쪽의 금강 주변 낮은 구릉지에 산성을 축성하여 하천과 구릉지를 이용한 방어체계를 갖출 수 있도록 자연 환경이 큰 역할을 하였다.

세종특별자치시에는 현재까지 33개의 산성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존의 연기군 시절만 하더라도 20개의 산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2012년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하면서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과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이 편입되어 이 지역에 있던 산성까지 주소지를 세종특별자치시로 옮기게 되었다. 수원의 화성이나 광주의 남한산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종특별자치시에 분포하고 있는 산성에 대하여 체계적인 학술 조사가 이루어지고 학문적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정비 복원이 이루어진다면 세종특별자치시의 산성을 관광자원화하여 세계문화유산과 같은 등록문화재로 만들어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특별자치시의 역사]

세종특별자치시는 금강 중류역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문화가 발달한 곳이다. 아직까지 대규모의 구석기유적이나 신석기시대 유적은 없지만 최근 행정중심복합도시 예정 지역의 조사 과정에서 여러 지역에 걸쳐 고토양층이 분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고, 구석기 유물이 수습되기도 하였다. 또한 석삼리 돌삼골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 1기가 조사되었다.

이와 달리 청동기시대로 오면 이전 시기에 비하여 다양한 유적들이 확인되었다. 행정중심복합도시와 관련된 조사를 통하여 송원리 유적, 연기리 유적, 대평리 유적 B~C지점, 석삼리 유적, 봉기리·황룡리 유적, 연동면 용호리 유적, 응암리 유적, 연기면 합강리 유적 등에서 청동기시대 초기~후기에 해당하는 주거지 및 취락 유적이 확인됨으로써 금강 중류역의 청동기시대 취락 연구에 중요한 자료들이 축적되었다.

세종특별자치시는 역사시대로 들어서면서 원삼국시대~백제시대 유적이 집중 분포하고 있다. 이는 원삼국시대의 공주시, 과거 연기군 일대가 마한 및 백제 후기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백제의 금강 유역 진출은 벽골지 축조가 이뤄지는 4세기 전반기 무렵인 비류왕대로 추정된다. 이후 한성이 함락된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그 일대의 강력한 토호 세력인 목씨 집단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는 웅진성을 중수하면서 사비도성을 축조하고, 웅진은 백제가 사비로 천도한 뒤에도 군사적 요충지로서 주목받게 된다.

행정중심복합도시와 관련된 조사가 계속 진행되면서 점차 그 실체가 확인되고 있다. 월산리 유적 및 월산리 황골 유적에서 원삼국시대 수혈유구가 확인되었다. 또 인근의 연기면 응암리 유적, 용호리 유적, 석삼리 돌삼골 유적에서는 주구토광묘와 토광묘를 비롯한 원삼국시대 주거지 등이 다수 확인되었다. 그밖에 서창동·신안동·성제리 토기산포지 등이 알려져 있다. 대평리 유적에서는 다수의 원삼국시대 주거지 및 수혈유구, 임천 유물산포지 1지점에서는 원삼국시대 토광묘, 방축리 유적에서는 원삼국시대 수혈유구와 구상유구 등이 각각 확인되었다.

연서면 와촌리조치원읍 대평리 등지에서 백제토기가 확인된 사례가 있다. 연서면 보통리·갈운리·월산리, 연동면 갈산리 등지에는 백제 석실분이 분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연동면 응암리 유적에서 백제 주거지 등이 확인되는 등 최근에는 백제의 구체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발굴조사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송담리·송원리 유적에서는 백제시대의 대형 석실분을 비롯해 석곽묘, 토광묘 등이 확인되었다. 당암리 가소골·막음골·부기동 유적에서는 백제시대 수혈유구와 석곽묘, 당암리 소골 유적에서는 백제시대 석곽묘와 옹관묘 등이 각각 조사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유적으로는 대평리 A지점 취락 유적이 있으며, 응암리 유적에서는 석곽묘가 확인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월산리 고분군, 월산리 황골 고분군, 보통리 고려시대 가마터 등이 발굴 및 조사되었다.

조선 전기 연기현은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중앙으로부터 수령이 파견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406년(태종 6)에 목주와 연기를 나누어 연기현에도 감무를 두었고, 1413년(태종 13) 감무를 현감으로 바꿈에 따라 현감이 파견되었다. 이듬해에는 ‘전의’와 ‘연기’를 합쳐 ‘전기’라 고쳐 부르고 전기 현감이 파견되었으며, 그 치소는 연기현이 아닌 전의현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1416년(태종 16) 다시 전의와 연기가 분리되어 각각 현감이 파견되면서 후대까지 이르게 되었다.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의 지방제도 개편을 거쳐 완성된 8도제가 실시되었을 당시 연기현은 행정적으로 충청도관찰사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그중에서도 청주목 관할 하에 있었으며, 연기현감은 충청도 청주진 중익 병마단련판관을 겸하였다. 하지만 1457년(세조 3), 지방 주요 지역에 거진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진을 거진 중심으로 편성하는 진관 체제가 실시되면서 연기군은 청주진관이 아닌 공주진관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연기현감은 절제도위를 겸하면서 첨절제사를 겸하는 공주목사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조선 후기 연기현은 왜군의 북로 상에서 벗어나 전란의 큰 피해는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공주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큰 피해를 보았다. 근방의 청주와 진천 역시 주요 교통로가 지나는 곳으로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으며, 조헌과 영규가 이끄는 의병이 청주성을 탈환한 전력도 있다.

6·25전쟁 후 1973년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공주군 반포면의 도암·성덕·영곡 3개리를 금남면, 장기면의 나성·송원 2개리를 남면에 각각 편입시켜서 1읍6면105동리로 구성된 연기군은 1990년 7월 20일 197개 행정리로 재편되었다. 이후 2005년 5월 18일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공포되고 이듬해 확정되었으며, 2010년 세종시 설치 등[법률 제10419호]이 공포된 뒤 2012년 7월 1일 자로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하게 되었다.

[세종특별자치시의 산성]

지역별로 살펴보면 부강면에 가장 많은 10개소가 있고, 전동면에 6개소, 전의면에 3개소, 소정면에 1개소, 조치원읍에 1개소, 연기면에 2개소, 연동면에 1개소, 연서면에 2개소, 장군면에 4개소, 금남면에 2개소, 나성동에 1개소 등이다. 이 중에서 운주산성, 보덕리산성, 남성골산성금이성은 최근까지 발굴조사가 일부 이루어져 성곽의 축조 방법과 축조 주체를 밝힐 수 있는 기본적인 자료가 확보되었다. 그러나 다른 산성들은 아직까지 기본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세종특별자치시에서는 이들 성곽에 대한 기초적인 학술조사를 실시하여 자료를 정리하고 분석하였고, 향후 문화재 지정신청 기초자료로 활용하고 유적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조사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기초조사를 바탕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 그 결과에 따라 세종특별자치시 성곽을 정비 및 복원하여 지역문화적 이해와 관광지로 개발하여 많은 시민뿐만 아니라 세종특별자치시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세종특별자치시의 역사를 알릴 계획이다. 또한 세종특별자치시의 전통문화 우수성을 외부에 알려 시민의 자긍심을 높이고자 한다.

금강에 접해 있는 부강리에서는 5세기경 고구려 목책 성곽과 관련된 유구들이 조사되었으며, 이보다 앞선 한성백제시기의 유물도 확인된 바 있다. 더불어 세종특별자치시는 삼국의 접경 지역에 해당되기 때문에 삼국시대 이후 관방 유적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백제~고려시대에 사용된 전의면 청송리운주산성, 전의면 달전리·전동면 송성리 금성산에 위치한 고려시대 석축산성인 금이성, 통일신라~고려시대에 사용된 전의면 대정리의 고려산성, 백제~고려시대에 사용된 남면 연기리와 보통리 사이의 당산성 등이 있다.

세종특별자치시에 분포하고 있는 성곽은 지역별로 크게 3개 권역으로 나뉠 수 있다. 북부권, 남서부권, 남동부권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세종특별자치시는 교통로가 고대부터 매우 발달된 곳으로, 현재의 국도 제1호가 남북 방향으로 지나가고 있어 교통로를 따라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남서부권과 남동부권에 위치하고 있는 산성은 대부분 고대 산성으로 인식되며, 이 일대가 삼국의 점이지대 및 접경지역이었음을 보여 준다.

북부권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는 산성에서 가장 많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운주산성은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부흥운동을 펼친 구국항쟁지로 알려져 있다. 운주산 등산로 입구에 고산사라는 사찰이 있다. 이 사찰에서 백제가 멸망한 음력 9월 8일 토요일을 기하여서 백제 멸망지의 의자왕과 부흥기의 풍왕, 백제부흥운동을 벌이다가 죽은 혼령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매년 백제 고산제를 지내고 있다.

그러나 백제 유물은 아직까지 소량만 확인될 뿐 대부분 통일신라~조선시대 유적이 확인되어 주류성으로 추정될 만한 증거는 확보되지 못했다. 성벽의 축조 수법 또한 백제보다는 통일신라에 의하여 축성된 수법이 확인되고 있지만 백제에 의하여 축성되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금이성은 두 차례에 걸쳐 조사가 진행되었다. 현문식의 성문과 출토된 유물을 바탕으로 신라에 의한 축성설이 제기되었다. 또한 성내에서 출토된 동곳 1점과 성벽 축조 수법으로 보아 고구려가 축성하였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고구려 유적으로 부강의 남성골산성이 있다. 남성골산성에서는 고구려의 목책성과 온돌주거지, 집수시설 등이 발견되어 지정학적인 입지로 보아 고구려의 남진과 관련되어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처럼 앞으로도 금이성에 대해서는 연차적인 조사 계획이 세워진 만큼 좋은 연구 성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밖에도 보덕리토성은 한 차례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축조 수법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 지방의 호족 세력에 의하여 축성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세종특별자치시의 산성 활용방안]

최근 산성을 특성으로 하는 스토리텔링을 개발하여 관광자원화하겠다는 지방자치단체가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성곽을 발굴·조사하고 주변의 민속 내용을 추가하여 이야깃거리를 만들다고 한다. 산성을 따라 둘레 길을 조성하면 자연스럽게 산책 및 등산로가 만들어지게 된다. 주변에는 이와 관련하여 먹거리 및 축제 등의 행사를 병행하여 진행한다면 사람들에게 스토리를 전하여 줄 수 있다. 세종특별자치시에서 진행하고 있는 운주산성의 고산재는 바로 이러한 내용을 전달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부강면에는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곽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지역별 단위 면적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 이들 성곽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산마다 연결되어 이어지고 있는 곳에 산성들이 배치된 모습이다. 아직까지 정확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대부분 고구려와 백제, 백제와 신라, 신라와 고구려 등의 접경 지역과 관련하여 빼앗고 빼앗기는 과정 속에서 축성된 산성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산성들은 삼국시대의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또한 서로 연결하여 등산로 및 산책로를 이어 간다면 이곳을 찾는 관광객에게 좋은 역사적인 내용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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