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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사림의 맥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1454
한자 湖西士林-脈
이칭/별칭 세종시와 호서사족
분야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해준

[개설]

조선시대 세종 지역의 정치와 사상 흐름을 주도한 대표적인 사족(士族)[문벌이 좋은 집안]으로, 호서 지역의 사족 활동에 연계된 가문과 인물을 말한다.

조선시대는 양반사족의 향촌 지배력이 강한 시대였다. 충청우도의 연기와 전의 지역은 토착성씨 및 사족가문의 활동이 주목되는 곳이었다.

세종 지역은 호서사족 활동의 중심지 공주·회덕과 인접한 지역으로, 사족들이 처향(妻鄕)[아내 친정 집안의 시조가 난 곳]이나 특별한 연고로 이주·정착하여 세거(世居)[한 고장에 대를 이어 삶]의 터전을 마련한 곳이다.

호서사족들은 세종 지역에서 여러 인물을 배출하고 다양한 활동을 하였으며, 그것이 오늘날까지 문화유적으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 세종 지역의 사족]

세종 지역의 사족가문들은 여말선초에 충절과 은거의 모습으로 입향 정착한 사례가 많다. 이 시기에는 고려에 절의를 지킨 충절인이 많다. 부안임씨 전서공 임난수가 대표적이다.

세종 지역에는 사림 활동이 정착되기 이전의 어려운 조건에서 배출된 사육신과 사림계 인물들이 있다. 성삼문(成三問)[1418~1456], 박팽년(朴彭年)[1417~1456], 김종서(金宗瑞)[1383~1453] 같은 경우가 바로 그러한 인물들이다. 이후 사화나 왜란 등 혼란기를 맞으면서 처향이나 외향(外鄕)[어머니 친정 집안의 시조가 난 곳]을 따라 이거, 낙향하여 재지 기반을 확보하고 사족 활동을 하게 된다.

사족들이 향촌 사회에서 자신들의 이념과 영향력을 과시하게 되는 것은 성리학적 지배 질서가 정착되는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에 이르러서이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충절을 실천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시 중봉 조헌과 같이 충절과 도학으로 위기를 극복한 인물도 많았다. 국가 전란 후 혼란에 빠진 지역민들을 교화함으로써 외란 후 민심을 수습하고 성리학적 질서 체제를 수습하고자 적극적인 향촌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사족들은 대체로 향촌 사회에서 중소 지주로서의 경제적 기반과 사족으로서의 신분적 배경을 가지고 향촌 사회 운영권을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향안(鄕案)·향규(鄕規)가 작성되고, 서원이 세워지고, 향약·동약·동계가 실시되기도 하였다.

연기현의 향안이나 향약(鄕約)은 바로 그러한 사족 활동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자료이다. 이를 통하여 시기별 활동상과 성씨별 인물 구성을 살필 수 있다.

조선시대 세종 지역의 대표적인 호서사족 가문으로는 연기면 세종리 부안임씨, 금남면 달전리 창녕성씨, 전의면 양곡리 안동김씨, 금남면 도암리 화순최씨, 연동면 명학리 장수황씨, 조치원읍 봉산리 강화최씨, 연서면 남양홍씨, 연동면 노송리 경주김씨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가문은 인물 배출과 활동, 유적, 기록을 통하여 전통 및 명망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호서 사족을 상징하는 조선 후기 인물로는 연산 출신의 사계 김장생과 김장생의 아들 신독재 김집 및 김장생의 고제(高弟)[뛰어난 제자]들인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초려 이유태, 노서 윤선거, 시남 유계 등이 거론된다.

김장생은 예학(禮學)으로 덕치(德治)의 정암 조광조, 도학(道學)의 퇴계 이황, 학문(學問)의 율곡 이이, 의리(義理)의 우암 송시열과 더불어 조선 오현(五賢)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김장생의 제자들인 이른바 충청오현(忠淸五賢)이 특색 있는 학문 사상과 활동을 실천함으로써 이후 호서 사족은 주로 공주목 지역과 서인계(西人系)[주로 기호학파]로 집중되었다.

이후 호서 사림이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두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623년 인조반정 이후이다. 서인들은 숭용산림(崇用山林)의 기치를 내걸고 산림(山林)[학식과 덕이 높지만 벼슬을 하지 않고 숨어 지내는 선비]을 등용하였다. 이때 호서 지역 인물들이 대거 징소(徵召)[국가가 강제로 사람을 불러들여 일정 기간 벼슬살이를 하게 하는 일]되어 산림 시대를 열게 된다. 산림으로 중용된 충청도 출신 16명은 거의가 김장생의 학맥이었다. 김장생[연산], 박지계[신창], 강학년[회덕], 김집[연산], 송준길[회덕], 송시열[회덕], 권시[유성], 윤선거[노성], 이유태[공주], 유계[금산], 송기후[회덕], 이상[전의], 윤증[노성], 권상하[청풍], 이기홍[연풍] 등을 꼽을 수 있다. 여기에는 전의 지역 출신인 이상(李翔)도 포함되어 있다.

[세종 지역의 사림과 사족 인물]

- 김휴(金休): 전의면안동김씨 입향조로, 호를 학당(學堂)이라 하였다. 고려 공민왕 때 검교로 왕을 시종하였고, 포은 정몽주에게 수학하였다. 조선 개국 후 전의 운주산 밑 학당[전동면 미곡리 학당]에 입향하였다. 향리에서 후학에만 힘을 쏟았으며, 충·효·열 삼강의 도리를 실천하여 주위의 칭송을 들었다고 한다. 마을 이름을 학당이라 부르게 된 것도 그의 호(號)를 딴 것이라 한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두 아들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의 요직을 받았다. 막내 사위가 바로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조부 박안생이다. 순천박씨들이 세종 지역에 터전을 잡게 된 것도 안동김씨의 사위로 처향에 살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타우(打寓) 이상(李翔)[1620~1690], 도암(陶庵) 이재(李縡)[1680~1746] 등은 김휴의 외손으로 알려져 있다.

- 성희(成熺)[?~1464]: 성삼문의 당숙이다. 자는 용회(用晦), 호는 인재(仁齋)이다. 비서원교리(秘書院校理) 겸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지냈으며, 기사관(記事官)으로서 『세종실록』과 『문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56년(세조 2) 성삼문을 도와 단종 복위를 꾀하던 중 거사가 발각되어 10여 차례나 극심한 고문을 받고 김해로 유배되었다. 2년 뒤 부강에 이르렀으나 서울 300리 바깥에 나가 살라는 세조의 명으로 상경을 포기하고 달전리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성희의 두 아들 중 생육신 성담수(成聃壽)는 경기도 파주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달전리에는 성담년(成聃年)[1441~1483]의 자손들이 동족마을을 형성하였다.

- 성삼문(成三問)[1418~1456]: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홍성 출신으로, 도총관 성승(成勝)의 아들이다. 1438년(세종 20) 식년 문과에 급제, 1447년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한 후 집현전 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홍문관 수찬으로 승진하였다. 1442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조선 시대에 유능한 젊은 문신을 뽑아 휴가를 주고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를 하였고,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최항·박팽년·신숙주·이개 등과 함께 이를 도왔다. 1453년(단종 1) 좌사간으로 있을 때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을 일으키고 성삼문에게 정란공신 3등의 칭호를 내렸으나 사양하는 소를 올렸다. 1454년 집현전 부제학이 되고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 예방승지로 있으면서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선위를 강요할 때 국새를 끌어 안고 통곡하였다. 이후 아버지 성승의 지시에 따라 박중림(朴中林)·박팽년(朴彭年)·유응부(兪應孚)·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 등을 포섭, 단종 복위 운동을 계획하였다. 1456년(세조 2) 단종 복위를 꾀하였고, 이로써 아버지 성승 및 사육신과 함께 처형되었다. 1691년(숙종 17) 신원(伸冤)[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림]되었고,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품계를 올려주거나 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죽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벼슬을 주던 일]되었다.

- 박팽년(朴彭年)[1417~1456]: 본관은 순천이고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이다. 형조판서 박중림의 아들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서 여러 가지 편찬사업에 종사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38년 사가독서를 하였고, 1447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1454년 형조참판이 되었다. 1455년(세조1) 세조가 즉위하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고, 이듬해 형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성삼문·하위지(河緯地)·이개·유성원·유응부·김질(金礩)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자신의 재능을 아끼는 세조의 회유도 끝내 거절하고 심한 고문을 받으며 옥중에서 죽었다. 아버지와 동생 박대년(朴大年), 아들 3형제도 사형을 당하였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 한충(韓忠)[1486~1521]: 본관은 청주이고 자는 서경(恕卿), 호는 송재(松齋)이다. 1513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 전적에 등용된 뒤 정언·이조정랑·응교를 역임하였다. 1518년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한 주청사 남곤(南袞)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갔으나 남곤과 의견이 충돌하여 남곤의 미움을 샀다. 1519년 전한을 거쳐 직제학, 동부승지,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1520년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있을 때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평소에 조광조(趙光祖)와 교유하였다 하여 거제로 유배되었다. 1521년 신사무옥이 일어나자 남곤의 책략으로 투옥되었다가 중종의 친국 후 풀려났으나 살해되었다. 율려(律呂)·음양(陰陽)·천문·지리·복서(卜筮)에 능하였다. 뒤에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 『송재집』이 있다.

- 신준미(申遵美)[1491~1562]: 본관은 평산이고 자는 사휴(士休)이다. 별제 신원(申援)의 아들이다. 유학 신분으로 1519년(중종 14) 현량과에 3등으로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고 과거 급제가 취소되자 공주로 물러나 금강가에 한림정(翰林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년)에 복과, 봉상시 주부와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 성제원(成悌元)[1506~1559]: 자는 자경(子敬), 호는 동주(東洲)·소선(笑仙)이다. 성담년의 손자이다. 전의면 달전리에서 출생하였고, 송귀수(宋龜壽)·송인수(宋麟壽)와 더불어 삼현(三賢)으로 칭하여졌다. 잦은 사화를 보면서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성운(成運), 조식(曺植)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쌓고 후학을 가르쳤다. 성리학과 지리, 의학, 복술 등에 두루 능하였다. 1553년(명종 8) 유일(遺逸)[조선시대 때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를 찾아 천거한 인재 등용책]로 천거되어 주부를 거쳐 보은현감에 제수되고,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들었다고 한다. 사후 규장각 제학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달전리 망동에 있다. 공주 충현서원, 창녕 물계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청헌(淸憲)이다. 문집으로 『동주유고』가 있다. 문집 목판이 현재 연기향토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달전리 뒷산에는 동주선생 망묘대(東洲先生 望墓臺)가 있으며, 성제원이 아침저녁으로 망묘대에 올라 부모의 묘소를 바라보며 그리워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이상(李翔)[1620~169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유겸(李有謙)의 아들이다.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운거(雲車) 또는 숙우(叔羽), 호는 타우(打愚)이다. 송시열을 통하여 김집의 학통을 이어받았다. 1658년(효종 9) 박세채·윤증과 함께 유일로 천거되어 자의에 임명된 뒤 진선을 지냈으며, 1661년(현종 2) 이후 지평을 비롯한 장령·집의 등 사헌부 관직을 맡기도 하였다. 현종 말년의 예송(禮訟)에서 남인인 허적(許積)을 탄핵하다가 실세(失勢)[세력을 잃음]하였으나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재등용되어 형조참의, 우윤,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 연간에 노론과 소론이 분기할 때는 송시열을 따라 노론의 편에 서서 남인의 등용을 주장하는 소론의 주장을 반대하였다.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세한 뒤인 1690년에 옥사하였다. 1717년 서인의 청원으로 복관(復官)[물러난 관직에 다시 돌아오게 함]되었으며, 이조판서를 증직 받았다. 전의 뇌암서원(雷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세종 지역의 서원과 사우]

세종 지역에서는 사족들의 활동과 관련하여 서원과 사우가 많이 건립되었고, 충·효·열 인물도 많이 배출되었다. 조선시대 사족 활동 유적으로는 서원, 사우, 정려가 많은 자료로 전하여진다. 조선시대 사족들의 유교문화 유적이 전체 문화재 자료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다양하고 활발한 활동상을 보여 주는 것이다. 특히 서원과 사우는 성현과 선유(先儒)[옛 선비 또는 선대의 유학자] 제향 및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서원과 사우는 학파나 가문의 형세 및 명성을 드러내며, 문도 혹은 문중 중심으로 설립되고 운영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세종 지역에 건립·운영된 서원과 사우는 10여 곳에 이른다. 이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우선 1651년(효종 2)에 세워진 봉암서원에는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한충(韓忠)이 제향되어 있었다가 1665년(현종 6) 송준길의 건의로 호서예학의 거두라 할 수 있는 김장생이 봉암서원에 추배되고 봉암(鳳巖)이란 사액을 받기에 이른다. 20년 뒤인 1685년(숙종 11)에는 송준길을 제향하고 1721년(경종 1)에는 송시열마저 추배하기에 이른다. 연기 지역 사족들의 성향이 호서사족의 학맥으로 연결되어 간 것이다. 그리고 초려 이유태(李惟泰)[1607~1684]를 제향하는 서원으로 1694년(숙종 20)에 세워진 갈산서원(葛山書院)도 있어 세종 지역의 사족 활동과 역할이 매우 중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송준길을 독향한 검담서원(黔潭書院)은 1694년(숙종 20) 송준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서원이다. 송준길은 같은 관내인 노봉서원(魯峯書院)에 제향되어 있었으나 1694년에 이르러 문의, 청주, 연기, 회덕, 공주 다섯 고을의 유림들이 한뜻으로 서원을 세우고 1695년에 사액을 받았다. 사당에는 김진규(金鎭圭)가 검담사(黔潭祠)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영조 24년(1766)에는 보만정 뜰에 검담서원 묘정비를 세웠다. 미호 김원행이 비문을 짓고 늑천 송명흠이 글씨를 썼다. 현재는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하여 철폐되고 보만정과 묘정비만 남아 있다. 이 시기는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 간 대립이 본격화될 때였다. 세종 지역 사족들은 정치적으로 서인-노론계 성향을 띤 것으로 보인다. 1699년에 건립된 전의 뇌암서원[현재는 문목사(文穆祠)]은 이상을 제향하는 사우로 창건되었다. 그러나 1704년(숙종 34)에 훼철되고, 노론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자 1717년(숙종 43) 호서 유생들이 타우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복설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뒤 이익(李翊)과 이만성(李晩成)을 배향하게 된다.

한편 문중서원으로는 1710년에 건립된 부안임씨의 기호서사(岐湖書社)와 1716년 성리학의 전래자 안향을 제향한 순흥안씨합호서원, 1827년 진주류씨의 금호서사를 대표로 들 수 있다. 부안임씨는 18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향안에 대거 입록되는 등 활발한 향촌 활동을 벌이는 한편 문중 활동에도 힘을 기울이게 된다. 기호서사는 부안임씨를 상징하는 유적이다. 1679년(숙종 5) 임난수의 묘를 보수하던 중 지석을 발견하고 우암 송시열에게 신도비문을 받아 신도비를 세웠다. 이와 연계하여 부안임씨들은 1710년(숙종 36) 임난수의 부조묘를 확대, 발전시켜 기호서사를 건립하였다. 처음 이름은 세덕사(世德祠)로, 임춘·임난수·임목을 제향하다가 1740년에 중수하였다. 이후 1805년(순조 5)에 임흥(林興)이 추배되었다. 기호서사는 1871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다른 서원이나 사우와 마찬가지로 훼철의 운명에 처하였다. 그러나 이때 전서공 위패는 세종조에 부조묘(不祧廟)[조선 시대에 신위를 옮기지 않도록 허락받은 신주를 모시는 사당]로 인정받은 사실을 감안하여 임씨 가묘에 모셔지게 되었다.

합호서원(合湖書院)안향(安珦)[1243~1306]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한 서원으로, 1716년(숙종 42)에 ‘합호사(合湖祠)’라는 가묘 형태의 영당 건립 단초가 된다. 금호서사(錦湖書社)는 1827년(순조 27)에 현재의 장군면 송원리에 건립된 사우로, 류진동(柳辰仝)·류형(柳珩)·류충걸(柳忠傑)을 제향한 진주류씨 문중사우이다. 금남면 영곡리에는 1805년(순조 5)에 건립된 병암서사(屛岩書社)의 유허도 남아 있다. 병암서사에는 기묘사화 때 화를 피해 내려온 신준미(申遵美)[1491~1562], 신점(申點)[1530~1601], 임정(林頲)[1554~1636]을 제향하였다. 1885년(고종 22) 남면 방축리에 지어진 덕성서원(德星書院)에는 임헌회(任憲晦), 전우(田愚), 이재구(李載九), 김준영(金駿榮), 이유흥(李裕興), 조홍순(趙弘淳), 임헌찬(任憲瓚) 등 한말의 호서 지역 유림을 제향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성리학을 기본 이념으로 하던 조선시대에 충·효·열은 매우 중요한 덕목이었다. 충·효·열 행적을 표창하고 장려하기 위한 구체적인 산물이 정려이다. 세종 지역에는 많은 충신·효자·열녀 정려가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오늘날 일부에서는 충청도의 사족문화와 선비문화를 권위주의나 입신양명, 나아가 봉건적 착취라고 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충청 지역을 대표하는 호서사림에 있는 선비정신은 결코 보수적이거나 관념적이라고 평가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혁적이고 혁신적이어서 그들의 주장이 보수 진영의 강한 견제를 받을 정도였다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충청도 선비정신에 담긴 현실 비판, 개혁 정신, 도덕성을 되찾는 일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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