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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1458
한자 韓國的抽象畫-大家張旭鎭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6년 - 장욱진 양정고등보통학교 3학년으로 편입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7년 - 장욱진 「공기놀이」로 최고상 수상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9년 - 장욱진 일본 국제미술학교 서양화과 입학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3년 - 장욱진 일본 국제미술학교 서양화과 졸업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7년 - 장욱진 신사실파 동인 결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4년 - 장욱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취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0년 - 장욱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사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3년 - 장욱진 화실 마련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5년 - 장욱진 서울 명륜동으로 돌아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0년 - 장욱진 창작 활동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6년 - 장욱진 창작 활동
성격 장욱진의 작품 세계

[장욱진의 성장기]

장욱진(張旭鎭)[1917~1990]은 1918년 1월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의 대지주 가문에서 4형제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욱진의 아버지는 시·서·화에 안목이 있어서 스스로 병풍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렸고, 아이들에게도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고 한다.

장욱진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공부보다는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였다. 경성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중고등학교] 미술반에서 그림에 열중할 때 일본 도쿄예대 출신 미술교사의 수업을 통하여 당시 유행하던 입체파와 피카소의 미술세계를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 역사 교사에 항의한 사건으로 퇴학 처분을 당한 뒤 화가 공영진 화실에서 그림 그리기를 계속하였다.

[전기: 자전적 향토세계(1937~1949)]

1936년 20세의 나이로 양정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한 장욱진은 4학년 때 ‘제2회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에 「공기놀이」를 출품하여 최고상을 받았다.

1939년 4월 일본의 국제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1943년 9월에 졸업하였다.

장욱진은 유학 시절 당시 화단(畵壇)의 움직임이나 학교 교육에서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책과 같은 간접적인 매체를 통하여 유럽의 현대미술뿐만 아니라 로마네스크·비잔틴을 비롯한 중세미술, 이집트나 중동의 고대 미술, 멕시코 민속미술, 아프리카의 원시미술 등과 같이 보다 민족적·토속적 기원과 고유의 정체성이 뚜렷한 미술품에 더욱 관심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장욱진은 1947년 김환기·유영국·이중섭 등과 함께 ‘신사실파’ 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조형적으로 아카데미즘을 거부하고 전통적인 요소의 현대적 번안(飜案)[원작의 내용이나 줄거리는 그대로 두고 풍속, 인명, 지명 따위를 시대나 풍토에 맞게 바꾸어 고침]을 연구한 모더니스트들의 회합이던 ‘신사실파’는 당시의 이념적 대립이 극심하던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작품에 열중하자는 취지로 결성된 모임이기도 하였다.

장욱진은 1949년에 ‘제2회 신사실파 동인전’에 「독」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독」은 장욱진의 작품세계 전체를 이해하는 데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과감하게 화면 중앙을 가득 차지하도록 독을 배치하고 뒤로 앙상한 나무를 걸치게 한 비현실적이며 과감한 구도와 소재들이 현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독」의 작품세계는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제2회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은 「공기놀이」는 전통적인 한옥을 배경으로 한복을 입은 인물들이 공기놀이를 하는 광경을 수수한 색감과 꽉 채워진 구도로 표현하였다.

「공기놀이」는 당시 화단에서 유행하던 향토색 경향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또한 「소녀」는 일본 유학시절 고향 마을 장욱진 집안의 선산을 관리하던 산지기의 딸을 모티프로 한 것이다. 아련한 소녀의 모습에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배어 나온다.

장욱진은 고향을 생각할 때 평소 쉽게 접하며 정들었거나 강한 인상을 받은 대상을 자연스럽게 모티프로 삼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녀」는 고향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3차원적 공간보다는 배경을 생략하는 평면적인 화면 처리가 강하게 두드러진다. 유학 시절 초기부터 현실 공간의 사실적 묘사보다는 대상의 간략화와 평면성, 비현실적인 공간 구성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자리 잡아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기: 자전적 이상세계(1950~1974)]

장욱진 작품 세계의 중기로 분류될 수 있는 1950년부터 1974년까지는 6·25전쟁이 일어난 시기부터 덕소에 거주하던 때까지의 기간이다.

중기에 이르러 장욱진의 정서는 초기에 보여 주던 향토적 세계를 뛰어넘어 보다 이상화된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나아간다. 이상세계에 대한 염원을 일으킨 계기가 전쟁인 것 같다.

1951년 9월 비교적 전쟁의 상흔이 덜한 고향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으로 돌아가게 된다. 고향에서 어느 정도 심신의 안정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고, 이때 나온 대표작이 「자화상」이다.

장욱진은 현실 상태에 대한 반작용을 이상적 상태라는 역설적 방향으로 펼쳐가게 된다. 「자화상」의 평화로움과 한가함은 전쟁으로 빼앗긴 현실과 비교됨으로써 역설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장욱진은 1954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취임하지만 재직 6년 만인 1960년에 교수직을 사임한다. 사임의 결정적 이유는 창작에 전념하고 싶고, 누구를 가르칠 체질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임 후 가장 큰 변화는 47세가 되던 1963년에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덕소에 화실을 마련하고 거처를 옮긴 일이었다. 덕소 시절로 이야기되는 덕소에서의 생활은 그 후 12년 동안 계속된다. 말이 12년이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집에서 혼자 생활한다는 것은 보통사람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결정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외로움과 불편함을 스스로 청하던 장욱진은 중년의 시기를 덕소에서 보내고 노년의 할아버지가 되어서야 덕소를 나오면서 순수추상의 실험기를 마친다.

덕소 시기의 대표작 중 하나인 「눈」은 덕소의 산과 강바닥에 쌓인 눈을 보고 그린 작품으로, 당시 장욱진이 실험하던 추상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작품에 속한다. 전체성과 평면성을 띠고 있으며, 장욱진의 작품 중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붓의 사용은 매우 격정적이고, 전체적 양상을 통하여 장욱진이 당시 서울을 중심으로 전개된 앵포르멜[1·2차 세계대전 후 서구에서 기존 가치의 상실에 대한 대안으로 인간의 실존에 주목하면서 나타난 회화운동] 경향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오래 가지 않았다.

또한 덕소 시기의 「진진묘」는 순수추상의 실험기를 마치고 등장한 작품 중 하나로, 1970년 정초에 서울 명륜동 집에 머물던 중 예불을 드리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아 곧바로 덕소 화실로 돌아가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그린 작품이다.

「진진묘」는 독실한 불교신자인 부인 이순경의 법명으로, 작품은 아내의 첫 번째 초상화이자 장욱진이 직접 제목을 붙인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다. 대상의 생략과 압축이 돋보이고, 인물의 자세와 표정이 바탕의 색감 및 질감과 어우러지면서 고도의 상징성이 우러나고 있다.

「가족도」는 정체성을 모색하면서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하기 위하여 추상화를 시도한 흔적이 보인다.

[후기: 종합적 이상세계(1975~1990)]

1975년 5월 장욱진은 12년간의 덕소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 명륜동으로 돌아온다.

1975년에 그린 작품 「초당」에는 마치 화선지 위에 먹을 듬뿍 먹인 붓으로 그린 것 같은 유화의 농담(濃淡)[색깔이나 명암 등의 짙고 옅은 정도]이 화면의 주된 경향을 이루고 있다.

또한 차를 달이고 있는 아이,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의 초당(草堂)[억새나 짚 등으로 지붕을 인 조그마한 집채]에 양반 자세로 앉아 있는 인물 모습과 같은 소재들은 전통적인 문인 산수화의 도상들로서 ‘도꾼’이 다 된 화가의 심상(心象)[감각에 의하여 획득한 현상이 마음속에서 재생된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신선들의 풍류를 현실에서 맛보고자 하는 작가의 정취는 다른 작품들에서 불교·도교·민화적 성격들이 다양하게 종합적으로 나타난다.

명륜동 시기의 「팔상도」는 부처의 탄생 장면, 태어나자마자 하늘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하는 아기 석가가 그려져 있다. 계속해서 출가하는 장면, 수행하는 장면, 열반(涅槃)[모든 번뇌의 얽매임에서 벗어나고, 진리를 깨달아 불생불멸의 법을 체득한 경지]에 들어 부처가 되는 장면 등이 이어진다. 부처의 머리 위에 그려 놓은 까치는 단순한 일상적 존재가 아니라 화가의 평화와 동심, 이상향과 고향에 대한 정서를 대표하는 초월적 존재인 동시에 종교적 심성까지도 지닌 상징적 존재임을 보여 준다.

같은 시기의 「아기부처」는 전통회화를 단순화하고, 초상화 기법으로 종교성[불교]을 보이기도 한다. 1980년부터 시작된 수안보에서의 생활은 이러한 풍류적 정취를 확고히 하는 시기였다. 수안보에 머물면서 그린 「나무」는 풍경 혹은 산수를 관념적으로 압축해서 표현하고 있다. 화가의 압축과 생략의 경지를 잘 보여 줌으로써 문인산수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생동감 있는 붓터치로 그린 「나무」는 살아있는 듯한 생명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장욱진의 제자 최종태가 ‘소묘과 형상성을 다 갖춘 그림으로 우리 현대미술에서 장욱진이 최고의 경지에 간 사람’이라고 평가한 것처럼 장욱진은 서구적인 표현력을 완벽하게 이해한 상태에서 동양적인 사고로 자신만의 그림을 구축하였다고 할 수 있다.

용인 시기의 「나무」는 배경의 어두운 색과 나무의 연두색이 청명한 대조를 이루는 작품이다. 비현실적인 풍경과 기하학적인 단순한 구상으로 이루어진 관념적인 풍경화다.

1950~1960년대의 짙은 색조와 기하학적인 단순한 구성을 다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대상을 표현하면서도 1950~1960년대에 비하여 훨씬 절제되고 정신적인 깊이가 느껴진다.

또한 거의 쓰지 않는 짙은 청색이 등장하는 것도 주목할 만한 요소다. 장욱진은 나무를 오랫동안 소재로 삼아 왔는데 시기에 따라 나무 형태가 달라지는 것이 특징이다.

마지막으로 장욱진이 거처를 정한 곳이 경기도 용인군 구성면 마북리의 한 오래된 집이다. 장욱진이 70세 되던 1986년 봄의 일이었다.

특히 세상을 떠나는 1990년까지 용인에서 지낸 5년간은 평생에 걸쳐 제작된 720여 점의 작품 중에서 거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220여 점이 그려진 가장 왕성한 창작 시기였다. 지금껏 즐겨 묘사하던 산·까치·집·나무 등의 소재들은 어느덧 장욱진에게 평생의 동무가 되었으며, 조형적인 배치도 한계를 넘어 자유자재로 구성되었다. 그러면서 1950~1960년대의 기하학적 구성과 동화적 심상이 다시 등장하는 등 복고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후기에 들어 화면의 실재적 풍경이 줄어들고 보다 환상적이고 관념적인 경향이 강하여졌다.

이러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화면 속 세계는 장욱진의 상상에 의하여 만들어진 가상 세계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가상 세계라는 점에서 관념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강변풍경」은 안개 낀 강가를 배경으로 초막이 한 채 지어져 있는데 가부좌를 튼 도인의 모습은 영락없는 장욱진 자신의 모습으로 보인다.

주변에는 학과 까치와 개가 화가를 바라보고 있어 마치 오랜 친구인 듯하고, 물빛과 하늘빛이 하나가 된 푸른 선경을 배경으로 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은 한가롭게 느껴진다.

장욱진은 마치 무릉도원의 신선 같기도 하고 선비 같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 장욱진이 거주하던 용인 집 근처에는 강이 있지도 않았으며, 살던 집도 초가집이 아닌 것으로 보아 관념적인 그림인 것을 알 수 있다.

[자유롭게 또는 동심적이면서도 해학적인 장욱진의 작품세계]

화가 장욱진은 직관적이고 어린아이 같은 심성으로 평생을 자연 속에 살면서 동화적이고 이상적인 내면세계를 그렸다. 까치 같은 새와 나무 등 자연에서 오는 소박한 소재를 사랑하고 다루었다.나는 “심플하다”를 강조하며 복잡한 체면과 권위에서 벗어나 일생을 깨끗하게 살려고 하였다. 자연 산물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안에 내재된 근원적이고 정신적인 본질을 추구하였다. 무척 외로운 것 같으면서도 고고하였고, 예술가로서 순도 높은 자부심의 소유자였다.

덕소 시절에 화실에서 오로지 그림만 그리면서 고독한 작업을 이어 갔다. 마음이 넓고 순진하고 모든 것을 달관한, 그래서 남의 시선이나 세상 돌아가는 것에는 초탈한 완전한 자유인의 기상을 가졌다. 가정 경제도 아내에게 맡기고 장욱진은 오직 그림만을 고집하였다.

장욱진은 수필집 『강가의 아틀리에』에서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 나는 내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죽는 날까지 그림을 위해 다 써버려야 하겠다. 남는 시간은 술로 휴식하면서 내가 오로지 확실하게 알고 믿는 것은 이것뿐이다”라고 술회하였다.

장욱진의 마음은 진작부터 이상세계에 살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장욱진은 그림으로 자신이 동경하는 이상향을 만들어 가는 작품 방식과는 반대로 이미 장욱진의 마음에 도래한 이상향을 그림을 통해 밖으로 내보이는 방식으로 작품에 임하였는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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