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7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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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彦龍-金泰河-金夏翊 |
영어음역 | Gim Eonyong·Gim Taeha·Gim Haik |
이칭/별칭 | 성서(聖瑞)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기화 |
[정의]
조선 후기 흥덕현 출신의 3대 충신·효자.
[가계]
김언룡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성서(聖瑞), 호는 충효당(忠孝堂). 아버지는 김치진(金致進)이다.
[활동사항]
김언룡(金彦龍)은 1562년(명종 17) 흥덕현 작천리 까치내[현 전라북도 정읍군 소성면 중광리]에서 태어났다. 1587년(선조 20) 아버지가 죽자 상을 마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여 선비다운 면모를 지켰다. 선조 때 왕명을 받들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길에 요동 벌판에서 갑자기 도적떼의 습격을 받았다.
김언룡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고 당당하게 도적들을 꾸짖고 나서 유유히 그 자리를 벗어난 순간, 느닷없이 먹구름이 하늘을 덮더니 뇌성벽력을 치면서 벼락을 때려 도적 떼가 몰살당하였다.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이 이 보고를 받고 김언룡의 행의는 “하늘이 돌봐 준 충신으로 왕명을 투철히 이행한 평소의 효심이리라.” 칭찬하여 ‘충효당(忠孝堂)’이란 세 글자를 써서 내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김언룡의 아들인 김태하(金泰河)[1583~1649]는 아버지의 행적을 좇아 어려서부터 효행이 돈독하였다. 열 살 때 어머니의 병환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로써 병을 낫게 했으며, 임진왜란으로 부모에게 대접할 고기반찬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하늘에 치성을 드리자 큰비가 내려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김태하가 물고기를 잡았다는 포구는 지금도 그 이름이 남아 있는 어룡포(魚龍浦)이다.
또한 난리에 식량이 떨어져 보리 이삭을 주워 모아 양식에 보태려고 온 들판을 헤매고 다니던 중, 하루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보니 마당 가득 까치 떼가 보리 이삭을 물고 와 입으로 보리 껍질을 벗겨 내고 있었다. 이와 같은 연고가 있어 그가 살았던 마을을, 마치 까치 떼가 내를 이루었다 하여 까치내라고 해서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불리고 있다.
김언룡의 손자 김하익(金夏翊)[1633~1697] 역시 가풍을 이어받아 효성이 지극하였다. 열일곱 살 때인 추운 겨울날 어머니가 안질로 고생이 많았는데, 의원이 잉어의 쓸개가 좋다는 말을 하였다. 이에 김하익은 눈 덮인 장연강(長淵江)에 나가 얼음을 깨고 그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늘에 기도를 올렸는데, 그 뜻이 하늘에 닿았던지 얼마 후 큰 잉어 한 마리가 튀어 올랐다. 잉어를 구한 김하익이 어머니의 병 구환을 했다는 소문이 조정에 알려졌다.
[묘소]
김언룡의 묘소는 전라북도 정읍시 소성면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97년(숙종 23) 충신 김언룡과 아들·손자의 2대 대효(大孝)를 기려 충·효 정려가 내려져 김해김씨 삼강 정려가 세워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