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B03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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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미옥 |
[정월 대보름엔 굉장했지]
“지금은 많이 없어졌어라우. 빈 집, 다 서울로 가고 많이 없어. 그때는 서울로 안 간게 요런데 곁방에서도 살고 사람 만했는디 인자는 얼매 안 되야 인자……. 우리 작은아들 낳든 해에까지 [당산제를] 다 허고, 그 멫(몇) 살 먹음서부텀 별로 안 했어라우. 참 억시게 했어라. 쇠꾼 사다가 했어, 쇠꾼, 꽹과리 치는 사람……. 그때는 인자, 고깔 쓰고, 다 맹글고[만들고] 전부 다 히서, 마을 사랑방이라고 있은게로 인자, 거그서 다 맹글아 갖고. 장구 다, 새로 저기 허고, 소구[소고] 허고. 이런 거 해 갖고. 인자 나오는 날이 있어. 술 한 동우쓱[동이씩] 내고. 마당 볿으러[밟으러] 댕기므는 볼만 했지라우. 무동 타고.”
그 옛날 선운리 진마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열나흗날 밤이면 마을 뒤편에 있는 당산나무에 제를 모시고, 보름날 아침부터 마을 사람들의 집을 돌면서 걸립을 했다. 제를 모실 때는 무척이나 조용하고 엄숙하게 지냈다고 한다. 생기 복덕을 봐서 운대가 맞고 부정하지 않은 깨끗한 사람을 골라 제관을 맡기고, 제 올리기 며칠 전부터 당산나무 주위에는 왼새끼로 정성스럽게 꼰 금줄을 둘러쳐서 외부인들의 출입도 엄격히 금지했다.
삼실과[대추, 사과, 곶감]와 돼지머리 등 정성스럽게 장만한 제물을 올리고, 제를 모실 때는 동네 개들도 짖지 않았을 정도로 엄숙했다. 그렇게 제를 모시고 나면 이어서 각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걸립을 했다. 떠들썩한 쇠 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 퍼졌다. 난장이었다.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걸립패를 따라다니면서 어깨춤도 덩실덩실 그야말로 ‘신나는’ 한판을 즐겼다.
진마마을 당산은 꽤나 영험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래서 부정한 음식을 먹고서는 당산나무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당산나무 가지가 부러져도 절대로 주워다가 땔감으로 쓰지 않았다고 한다. 잘못하면 ‘지굴 만난게로[당산신의 벌을 받아 몸이 아프거나 죽는다는 의미]’ 사람들은 함부로 당산나무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벌써 30년 전인 1970년대 말의 얘기란다.
제를 모시지 않게 되면서부터 마을에 크고 작은 사고들이 좀 있었지만 이내 잠잠해져 버렸고, 이제는 제를 모실 사람도 없고 쇠니 장구니 소고니 이런 것들을 칠 이도 없다.
[그 고생스런 세월 누가 알까]
고창군 성내면 처녀 오갑순 씨가 진마에 사는 황석중 씨와 결혼한 것이 벌써 70년이 흘렀다. 그녀가 시집왔을 때부터 진마에서는 매년 정월이면 당산제도 모시고 걸립을 다녔지만 이제는 너무나 조용한 마을이 못내 서운하다. 그녀는 열일곱 살인 1938년 11월 20일에 당시 스물여섯이나 먹은 신랑과 혼인을 했고, 그때부터 그녀의 이름은 오갑순이 아닌 ‘대산몰댁’으로 바뀌었다.
오갑순 씨가 시집왔을 때 시부모님 두 분 다 살아 계셨지만 시아버지는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였다고 한다. 게다가 육신을 제대로 못 쓰는 남편의 형님 한 분까지 있었으니 참으로 갑갑한 세월을 살았다고 한다. 중간에 손위 시아주버니가 장가를 갔지만 비슷한 형편의 여자가 형님으로 들어온 탓에 대산몰댁은 시부모 공양에 형님 내외 살림까지 도맡아 하느라 하루해가 어떻게 뜨고 지는지도 몰랐단다.
처음 시집왔을 때 시댁에는 논이 7~8마지기 정도 있었다고 한다. 조사자가 그 정도면 아주 빈농은 아니었겠다고 하니, 오갑순 씨가 바로 한 마디 하신다.
“비가 와야 모를 심궈서 쌀밥을 먹제. 비가 안 온게, 하늘만 이러고 쳐다보고. 그래서 맨 숭년[흉년]만 들고. 맨~ 숭년 들고. 아무게라도 인자, 비가 와야, 거시기, 모를 심는디. 비가 안 온게, 다…….”
아주 작은 농사는 아니었지만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으면 꼼짝없이 농사를 망쳐야 하는 시절이었으니, 그것으로 온 식구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 부족했기에 흉년이 든 해에는 서숙이나 좁쌀, 메밀을 갈아서 먹고 겨우내 고구마로 끼니를 때웠다고 한다. 마침 함께 길을 걷던 중 메밀밭이 나오자 오갑순 씨는 손으로 메밀을 훑어보면서 한마디 하신다.
“한참 더 익어야 쓰겄구만…….”
젊은 사람들에게 메밀이야 이효석의 소설을 생각하게 하는 장치일 뿐이지만, 오갑순 씨 세대에게 메밀은, 그것을 만지는 당신의 거친 손바닥처럼 힘들었던 지난날의 아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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