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연기면 세종리 부안임씨 집성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594
한자 燕岐面世宗里扶安林氏集姓村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지도보기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이해준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에 있는 부안 임씨 집성촌.

[개설]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는 전서공(典書公) 임난수(林蘭秀)의 정착 이후 600여 년을 이어 오는 부안임씨의 동족적 유서가 깃들어 있는 집성촌이다. 세종리에 거주하는 주민들 성씨는 대부분이 부안임씨이다.

임난수의 둘째 아들인 임목은 양양공파, 임서는 사직공파, 임흥은 위의공파로 파가 갈라진다. 양화리부안임씨들은 대부분 양양공의 후손이다.

임목이 강원도 양양에서 선정을 베풀었다고 하여 지명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하며, 원래 벼슬 이름은 부사공이다.

세종리부안임씨 연기 지역 입향조인 전서공 임난수[1342~1407]이다.

유적으로는 임씨 가묘(林氏家廟), 독락정(獨樂亭)과 문중 재실인 숭모각(崇慕閣) 등이 있다. 원래 마을 이름은 양화리 또는 세거리라 하였다.

[입향 경위]

부안임씨 연기 지역 입향조 임난수는 전라북도 부안에서 임숙(林淑)의 아들로 태어나 32세 때인 1374년(공민왕 23) 최영 장군과 탐라 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 탐라 정벌 당시 오른팔을 적에게 잘리자 잘린 팔을 화살통에 꽂고 계속 싸워 전승으로 이끌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하여 온다.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전서에 올랐으나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한 하늘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관직을 버리고 충청도 공주목 삼기촌[현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에 낙향하였다고 한다.

[전설 일화]

임난수는 낙향 후 고려를 생각하면서 전월산 상려암(想麗巖)에 올라가 고려 수도인 개경을 향하여 무릎 꿇고 묵상에 잠겼다고도 하며, 아침저녁으로는 부왕봉(俯王峰)에서 왕에게 예를 올렸다고도 한다.

전월산 정상에 있는 용천(龍泉) 또는 영천(靈泉)이라 부르는 우물도 전서공이 고려 임금의 안녕을 기원하였다고 전해지는 전설이 있다.

남수문(南秀文)이 지은 「독락정기(獨樂亭記)」에는 세종리의 수려한 경관을 역사적·상징적 의미로 해석하여 “북쪽에는 원수산이 성곽처럼 둘러져 있고, 남쪽에는 계룡산이 하늘에 드높이 솟아 있으며, 동서쪽의 여러 산들이 혹은 조회하는 듯, 혹은 읍하는 듯하여 기이한 형상으로 보이는 것이 한두 가지만이 아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인물과 유적]

임난수가 죽고 10여 년이 지난 1419년에 세종이 고려의 유신으로 조선조에 벼슬하지 않은 임난수의 사당에 ‘林氏家廟’(임씨가묘)라 적은 편액(扁額)[널빤지나 종이, 비단 따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써서 문 위에 걸어 놓는 액자]을 하사하였다. 임씨 가묘는 불천위(不遷位)[큰 공이 있어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로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로 모시도록 한 사당이다. 당시 사제문과 아울러 사패지(賜牌地)[고려·조선시대에 임금이 내려준 논밭]로 나성 일대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임씨 가묘는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42호로 지정되어 있다.

독락정은 금강 팔정의 하나로 꼽히며, 임난수의 둘째 아들 임목(林穆)[1371~1448]이 낙향하여 건립한 것이다. 임목은 태종조에 급제하고 여러 고을 수령을 지내면서 청렴과 검소함을 스스로 지킨 인물이며, 백성을 잘 다스려서 교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양양도호부사를 지내다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독락정을 지어 한가히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정자 내부에는 남수문이 지은 정자기와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독락정 찬시(讚詩) 3수(首)가 걸려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자 이름 독락(獨樂)은 송나라 정치가 사마광(司馬光)[1019~1086]이 은퇴하여 만든 정원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독락정은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기호서사는 부안임씨가 18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활발한 향촌 활동을 벌이는 한편 문중 활동에도 힘을 기울이게 되는 시기의 상징적인 유적이다. 1679년(숙종 5) 임난수의 묘를 보수하던 중 지석(誌石)[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이나 무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은 도판 또는 판석]을 발견하고 우암 송시열에게 신도비문을 받아 신도비를 세웠다. 이와 연계하여 부안임씨들은 1710년(숙종 36) 임난수의 부조묘를 확대, 발전시켜 기호서사를 건립하였다. 처음 이름은 세덕사(世德祠)로, 임춘·임난수·임목을 제향(祭享)[제사를 지냄]하다가 1740년에 중수하였다. 이후 기호서사에는 1805년(순조 5)에 임흥(林興)이 추배된다. 기호서사는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다른 서원·사우들과 함께 훼철(毁撤)[헐어서 치워 버림]의 운명에 처한다. 그러나 전서공의 위패는 세종조에 부조묘로 인정받은 사실을 감안하여 임씨 가묘에 모셔지게 되었다.

숭모각임난수의 부조묘 자리에 건립한 것으로, 전월산 서쪽 비탈진 곳 아래에 위치하여 남서향으로 축조되어 있다. 사우는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다포 양식의 화려한 익공(翼工)과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올렸다. 각 칸의 정면에는 4분합 문을 달았으며, 창방 위에는 창살을 달았다. 사우의 서쪽 측면에는 ‘林氏家廟遺址(임씨가묘유지)’라고 음각된 화강암 석재의 호패형 비석(1923년)이 세워져 있다. 현재의 숭모각은 1958년 삼문과 1964년 본전을 완성하여 오늘에 이른다. 부안임씨 시조인 충절공학사 외 12현의 위패를 안치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3일 전국의 부안임씨들이 모여 제향한다. 숭모각은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압각수(鴨脚樹)는 양화리 정자동의 옛 행단 자리에 서 있는 은행나무이다. 고목은 지금으로부터 650여 년 전 전서공 임난수양화리 정자동에 은거(隱居)[세상을 피히여 숨어서 삶]하면서 집 주변에 심은 것으로 전하여진다.

[의의와 평가]

1935년 『조선의 취락』에는 충청남도의 특색 있는 동족 부락으로 세종리가 “교통이 편리하며, 배후에는 전월산이라 칭하는 명산이 있어서 춘추 2계절에 문인 묵객의 내유하는 자가 많다.”고 소개되고 있다.

세거리는 충청도·전라도·경상도로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의미에서 ‘삼기(三岐)’ 또는 ‘세거리’라 이름 붙여진 곳이다. 세거리는 금강 변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로서 육로와 수운의 이로움을 모두 갖춘 곳이다.

세거리는 부안임씨의 다양한 유적과 유서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