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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630
한자 宋明欽
영어공식명칭 Song Myeongheum
이칭/별칭 회가,역천,문원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갈산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안경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05년(숙종 31)연표보기 - 송명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55년(영조 31) - 송명흠 옥과현감이 됨
몰년 시기/일시 1768년(영조 44)연표보기 - 송명흠 사망
묘소|단소 송명흠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갈산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학자
성별
본관 은진
대표 관직|경력 서연관|옥과현감

[정의]

조선 후기 세종 지역에 묘를 쓴 문신이자 학자.

[개설]

송명흠(宋明欽)[1705~1768]은 조선시대 학자이다. 자는 회가(晦可), 호는 역천(櫟川)이다.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1606~1672]의 현손(玄孫)[증손자의 아들]이며,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문인이었다.

임성주(任聖周), 신소(申韶), 김양행(金亮行), 송명휘(宋明輝), 송환기(宋煥箕)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서로 논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였다.

송명흠은 아버지 송요좌가 연기현령으로 발령이 난 1718년(숙종 44)에 연기 지역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가계]

송명흠의 본관(本貫)은 은진(恩津)이다. 송준길의 현손(玄孫)이며, 조대비로 일컬어지는 신정왕후의 외조부이기도 하다. 부친은 묵옹(黙翁) 송요좌(宋堯佐)[1678~1723]이다.

[활동 사항]

송명흠은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공부하여 20세 이전에 이미 학자들의 촉망을 받았다.

사화(士禍)를 피하여 아버지를 따라 옥천(沃川)으로 이주하였고, 후에 도곡(塗谷)으로 옮겨 살았다.

동생인 한정당(閑靜堂) 송문흠(宋文欽)[1710~1752]과 같이 이재의 제자로 수학하였으며,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과 왕래하여 학문을 논하였다.

그후 학행(學行)으로서 공릉(恭陵)참봉, 사헌부지평, 장령 등의 벼슬이 내렸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754년(영조 30)에는 서연관(書筵官)의 벼슬을 내리고 불러들이자 또 거절하고, 이듬해 옥과(玉果)현감으로 취임하였다.

대흉년 때 구제에 만전을 기하여 치적(治績)[공적]을 올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옥과현감을 사임하였다.

송명흠에게 집의·동부승지·예조참의 벼슬을 주었으나 다 거절하고 만년에 찬선(賛善)[조선시대에 세자시강원에 속하여 왕세자의 교육을 맡아 보던 정3품 벼슬]으로서 경연관(經筵官)을 겸임하였다.

임금에게 논어를 강의하였으나 시사 문제를 논하다가 영조의 비위에 거슬려 파직(罷職)[관직에서 물러나게 함]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사후 정조 대에 복권(復權)되어 이조판서로 추증(追贈)[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죽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벼슬을 주던 일]되었다.

송명흠은 당시 가장 첨예한 사도세자 문제에 대한 상소로 유배를 간 박치륭의 석방을 건의하였으며, 역적으로 죽은 심사순(沈思順)을 파양(罷養)[양자 관계의 인연을 끊음]하는 문제가 잘못되었다고 직언함으로써 삭탈관직(削奪官職)[죄를 지은 자의 품계와 벼슬을 빼앗고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그 이름을 지움]과 유배를 당하였다.

[학문과 저술]

송명흠은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기 위하여 이재(李縡), 민우수(閔遇洙), 송사능(宋士能), 김양행(金亮行), 신소(申韶) 등과 서신으로 학문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송명흠은 기(氣)보다 이(理)를 더 중시하고 본연지성에 초점을 맞춰 경(經)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송준길을 뿌리로 하는 가학(家學) 전통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송명흠은 경(經)을 인간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최상위의 가치이자 국가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여겼다.

저서로는 『역천집(櫟泉集)』, 『역천소말조진(櫟泉疏末條陳)』 등이 있다.

한편 뛰어난 서예가인 송명흠의 글씨는 간찰과 전서, 현판 액자가 전해 오는 덕분에 뛰어난 서체의 특성을 살펴볼 수 있다.

[묘소]

송명흠의 묘소는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갈산1리 원텃말 뒷산 언덕에 자리한다. 본래 금산에 있던 것을 1792년(정조 16) 연기현 갈산리[현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갈산리]로 이장하고 묘갈(墓碣)[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럼한 작은 비석]을 세웠다.

[상훈과 추모]

송명흠은 정조 대에 복권되어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시호(諡號)[제왕이나 재상,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는 문원(文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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