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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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烈女昌寧成氏結城張氏旌閭 |
이칭/별칭 | 옥천전씨 쌍열 정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도담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순영 |
건립 시기/일시 | 177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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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01년 05월 31일![]()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문화재 해지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현 소재지 | 열녀 창녕성씨 결성장씨 정려 -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서 해체 보관 중 |
원소재지 | 열녀 창녕성씨 결성장씨 정려 -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송원리 |
성격 | 정려 |
양식 | 겹처마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옥천전씨 문중 |
관리자 | 옥천전씨 문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28호 |
세종특별자치시 도담동에 있었던 전오복의 처 창녕성씨와 전오륜의 처 결성장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후기에 세운 정려.
열녀 창녕성씨 결성장씨 정려는 창녕성씨와 결성장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창녕성씨와 결성장씨는 각각 옥천전씨 전오복(全五福)[1714~1735]과 전오륜(全五倫)[1717~1753] 형제의 처로, 동서지간이었다. 1600년대 후반에 전세승(全世承)이 옥천전씨 중 처음으로 연기에 거주하기 시작하였으며, 전오복 형제는 전세승의 5세손이다.
형 전오복이 1735년(영조 11) 병에 걸려 죽자 그의 아내 창녕성씨가 남편의 뒤를 따라 죽었다. 형과 형수가 죽은 지 18년이 되던 1753년(영조 29) 동생 전오륜의 아내 결성장씨가 병이 든 남편을 간호하여도 사경을 헤매자 남편이 죽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다며 자결하였다. 한 달 뒤 남편 전오륜도 사망하였다.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방축리[현 세종특별자치시 도담동]에 있었다가 현재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서 해체 보관 중이다.
열녀 창녕성씨와 결성장씨의 쌍정려는 결성장씨가 죽고 나서 19년 만인 1772년(영조 48)에 명정을 받아 건립되었다. 이들의 명정 사실은 예조에서 편찬한 『효행등제등록(孝行等第謄錄)』의 영조 48년(1772) 정려질(旌閭秩)에 ‘고 사인 전오복 처 성씨 기제 오륜 처 장씨 병정(故士人 全五福妻 成氏 其弟 五倫妻 張氏 竝旌)’이라 하여 같은 해 충청도 내 14개 명정사적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창녕성씨와 결성장씨가 열녀로서 명정을 받게 되는 것은 결성장씨의 아들이 성장한 후 본격적인 추숭(追崇)[죽은 사람을 기리며 숭상하거나 관위 또는 존호를 올림] 작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결성장씨의 두 아들 전현도(全顯道)와 전이도(全以道)가 일찍부터 송환기(宋煥箕)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고 하며, 훗날 정려기문을 송환기가 쓴 것에 비추어 보아 창녕성씨 결성장씨가 명정을 받도록 주도하였을 가능성이 짙다.
열녀 창녕성씨 결성장씨 정려가 건립된 후 200년이 넘도록 사라지지 않고 보존되어 온 것은 후손들이 이 지역에 꾸준히 거주하면서 보호하였기 때문이다. 몇 차례에 걸친 중수가 있었을 것이지만 관련 자료가 없어 중수 사실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해체되기 전 열녀 창녕성씨 결성장씨 정려는 정면·측면 각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었다. 열녀 창녕성씨 결성장씨 정려의 4면에는 홍살이 돌려져 있었다. 화강석재를 가공한 8각의 초석이 기둥을 받치고 있었다. 오른쪽 두 기둥은 높은 주초석이고, 왼쪽 두 기둥은 낮은 주초석이다.
해체되기 전 열녀 창녕성씨 결성장씨 정려의 중앙 상단부에는 명정현액이 걸려 있었고, 후면 상단부에는 정려기 2개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1793년(정조 17)에 송환기가 지은 ‘이열부정려문(二烈婦旌閭文)’과 1772년(영조 48)에 이조판서 조명정(趙明鼎)이 짓고 연기현감(燕岐縣監) 황운조(黃運祚)가 쓴 ‘제성장양절부정려후(題成張兩節婦旌閭後)’가 있었다.
열녀 창녕성씨 결성장씨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열녀 창녕성씨 결성장씨 정려는 동서지간에 열행을 행한 창녕성씨와 결성장씨를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손자들에 의한 조상 추숭의 모습을 통하여 조선시대 사족(士族)[사대부지족의 준말로, 조선 시대 지배층을 통칭하는 말] 가문의 현조추숭 활동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