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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927
한자 安東金氏雙孝旌閭
이칭/별칭 효자 김익정·김사준 정려
분야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양지편길 64-30[양곡리 28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고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축|증축 시기/일시 1820년 - 안동김씨 쌍효 정려 중건
문화재 지정 일시 2014년 09월 30일연표보기 - 안동김씨 쌍효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16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14년 09월 30일연표보기 - 안동김씨 쌍효 정려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6호 지정
문화재 해지 일시 2014년 09월 30일연표보기 - 안동김씨 쌍효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16호 지정 해지
현 소재지 안동김씨 쌍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양지편길 64-30[양곡리 286]지도보기
원소재지 효자 김익정·김사준 정려 -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양곡리 285
성격 정려
양식 겹처마 맞배지붕
정면 칸수 2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안동김씨 문중
관리자 안동김씨 문중
문화재 지정 번호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6호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양곡리에 있는 안동김씨 2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후기에 세운 정려.

[개설]

안동김씨 쌍효 정려안동김씨 집안의 김익정(金益精)[?~1436]과 김익정의 현손(玄孫) 김사준(金師俊)[1439~1520]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김익정김휴(金休)의 아들로, 호는 운암(雲庵)이다.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에서 태어나 1396년(태조 5) 문과에 장원 급제한 뒤 삼사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 후 세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나아가 충청·전라·경기 관찰사를 지냈다. 후에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1425년 대사헌, 1431년 이조참판과 형조참판을 지냈다. 1435년 경상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사망했다. 성종조에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복창군(福昌君)에 봉하여졌다.

김익정은 전의 지역을 떠나 벼슬길에 올랐기 때문에 묘는 경기도 양주군 고령산 고령사(高嶺寺) 서남쪽 3리 지점에 있었으나 실전하여 전의면 양곡리 압실에 단을 설치하였다. 김익정은 영월군사로 있을 때 청렴하고 흥학에 공이 커서 지금까지도 칭송되고 있다고 한다.

김익정은 사헌부 대사헌 재임 중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관직을 사직하였으며, 부모가 숨을 거두자 3년씩 6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등 효행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김익정은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 후인 세조 대에 명정을 받았다. 『충청도 읍지』, 『호서읍지』 「전성지 인물조」(1895), 『전성지』 「인물조」, 『대동신편(大東新編)』 「효자록」, 『연기지』, 『조선환여승람』 등에 김익정의 효행이 기록되어 있다.

김익정의 현손 김사준은 자가 명숙(明叔)이고 호는 은암처사(恩庵處士)이다. 1439년(세종 21)에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낸 김구년(金龜年)의 5형제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정에 출사하여 정사를 보았다. 어머니 이씨는 효령대군의 아들 의성군(誼城君) 이채(李寀)의 딸이다.

1455년(단종 3) 수양대군이 단종을 상왕으로 올리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정변을 일으켰는데, 김익정의 부친은 이를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연기군 전의면 양곡리로 낙향하였다. 김사준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벼슬은 물론 과거에도 일절 응하지 않고 오직 효행과 덕을 쌓는 데만 노력하였다.

김사준은 부친이 부스럼으로 고생할 때 연근을 구하여 병을 낫게 하였으며, 부친이 75세에 사망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러한 효성이 인근 사림들에게 알려져 1469년(예종 1) 예종이 친히 칙사를 보내어 위로하고 능찬봉(陵參奉)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김사준은 능찬봉 벼슬을 사양하고 전의 추하(楸下)[현 양곡리]에 은거하여 학문을 가르치는 일을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

김사준 사후 약 25년 후인 명종 대에 이르러 ‘그의 出天之孝는 永世不忘이라’ 치하하며 효자로 명정을 내렸다.

[위치]

전의면 소재지에서 691번 지방도로를 타고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쪽으로 약 4.5㎞ 가면 양곡리 양지촌 마을이 나오고, 마을 입구에서 동남쪽으로 약 700m 가면 논 위 언덕에 안동김씨 재실인 양모재가 나온다. 안동김씨 쌍효 정려김환(金瓛) 처 남양홍씨(南陽洪氏) 정려와 함께 양모재 안에 서향하여 세워져 있다.

[변천]

현재의 안동김씨 쌍효 정려는 1820년 김익정의 유지가 있던 곳에 중건된 것이다.

[형태]

안동김씨 쌍효 정려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건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원형초석 위에 둥근기둥을 올렸으며, 전후면은 홍살을 둘렀으나 좌우측면은 시멘트로 막아 두었다. 안동김씨 쌍효 정려의 각 칸 하방은 시멘트로 고맥이를 하였다. 양 측면 박공 밑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판을 설치해 놓았다.

[현황]

안동김씨 쌍효 정려의 왼쪽에 김익정이 세조조에 명정을 받고 1820년 중수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현판[有明朝鮮國孝子 嘉善大夫行司憲府大司憲 金益精之閭 世祖朝 命旌 今上二十年庚辰三月 日 重建]이 걸려 있고, 오른쪽에는 김사준이 명종조에 명정을 받고 역시 1820년 중수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현판[有明朝鮮國孝子 處事 金師俊之閭 明廟朝 命旌 今上二十年庚辰三月 日 重建]이 걸려 있다. 현판의 크기는 둘다 가로 145㎝, 세로 48㎝이다.

안동김씨 쌍효 정려 중수기는 중수 직후인 182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송치규(宋穉圭)가 찬하고 영춘현감 유한지(兪漢芝)가 썼다. 지금의 정려 주변에는 시멘트 기단을 돌려 깨끗이 정비해 놓았다.

안동김씨 쌍효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연기 지역 안동김씨는 모두 고려 후기 무신이자 정치가인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1212~1300]의 후손이다. 『호서읍지』(1871)에 전의현 원거성씨로 안동김씨가 전의이씨에 이어 두 번째로 기록되어 있으며, 수록 인물도 19명으로 가장 많다. 김익정·김사준 효자 외에 열녀로 김환남양홍씨가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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