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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016
한자 儒敎
영어공식명칭 Confucianism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홍사열

[정의]

세종 지역에서 공자의 사상과 관련된 학문과 의례 및 활동 제반.

[개설]

세종 지역의 유교문화는 조선시대 향교와 서원 중심으로 형성·발전되었으며, 지역사회 형성과 유지에 크게 기여하였다.

유학사상을 바탕으로 충절과 충의를 강조하며, 향약을 통한 지역공동체 형성과 운영에도 기여한다.

현재 세종특별자치시를 대표하는 상당수의 역사 인물들은 이러한 유교의 사상적 기반 아래 교육받고 성장하여 활동한 인물들로, 지역 정체성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세종 지역의 유교 문화 전파]

연기군에 지리적 근간을 두고 있는 세종특별자치시는 충청남도 지역의 유교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영남학파와 더불어 한국 유학사의 대표적 학파인 기호학파의 주 활동무대가 충청남도였다.

예부터 세종 지역은 기호학파의 본산인 논산, 공주와 가까워 교류가 많았다.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양반 종가뿐만 아니라 충청 유학을 한 단계 성장시킨 유학자와 충절 인물도 많이 배출되는 등 유학의 맥을 잇고 있다.

고려 말 유학은 성리학자로 대표되는 백이정[1260~1340]과 이색[1328~1396] 등으로 상징된다.

충청남도 지역의 유학은 충선왕을 따라 중국 연경에 가서 성리학을 연구한 보령 출신 백이정의 영향하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백이정은 이제현, 박충좌, 이곡, 백문보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향교와 서원]

세종 지역 유학의 본격적인 시작은 1416년(태종 16) 연기향교전의향교 건립부터라 할 수 있다. 이때부터 지역 단위에서 체계적인 유학의 교육과 교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향교는 조선시대 군현에 설립된 교육기관이었다. 유학적 사회 분위기 조성과 교화, 인재 양성과 유자들의 활동 기반으로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특히 향교의 경우 지방교육의 상징적인 기구로, 관학(官學)[나라에서 세운 학교나 학원 등 교육 기관]을 담당하였다.

향교 설립 이후 다수의 서원들이 등장한다. 서원은 일종의 사학기관으로,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유학의 학문적 뿌리는 조선 중기 도학정치 구현의 지치주의(至治主義)[권력자가 인·의·예·지의 유교 이념을 철저히 실천해서 군자가 되어야만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공자의 사상]를 내세운 정암 조광조와 뜻을 함께한 송재 한충으로 보기도 한다.

세종 지역에는 전의향교연기향교 외에도 충절 인물과 학자를 제향하는 서원과 사우 등이 많다.

뇌암서원 터[이상·이익·이만성·신후윤·홍방 배향], 봉암서원 터[한충·김장생·송시열·송준길 배향], 합호서원[안향 배향], 덕성서원, 문절사[성삼문 배향], 조치원 봉산영당[최용소 배향], 덕천군사우[덕천군 배향], 남산영당[남이웅 배향], 정사당[변응정 배향], 숭모각[임팔급·임몽주·임자미 등 부안임씨 15명 배향], 병산사[성기운 배향], 문목사[이상 배향], 충정사[이명 배향], 어서각[강순룡 배향], 임씨 가묘[임춘·임난수·임목 등 배향] 등이다.

이들 서원과 사우는 오늘날 세종특별자치시의 중요한 유교문화 유산으로 남아 있다.

[향교와 서원의 역할]

유교문화의 중심인 향교와 서원의 역할 및 기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지성인들의 집회소 역할을 담당하였다. 지방의 고급 인재들이 수시로 출입하며 교류한 곳으로, 당시의 지성사적 전통과 정신문화 중심지로서의 지위가 있었다.

지식교육인 강론뿐만 아니라 학문과 시대가 요하는 쟁점에 대한 토론 및 토의가 이루어졌고, 여론 형성과 결집·발산의 장이기도 하였다.

유자들의 유대와 결속을 높여 지연과 학연을 바탕으로 한 정치세력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둘째 사회교육의 장이었다. 소학 보급, 향사례·향음주례·향약 실시, 사창의 등이 향교를 기반으로 정착되어 갔다. 서원은 조선 중기를 지나 사족 활동의 거점으로, 사회교육의 실현처 기능을 담보하였다. 특히 연기향교 중심의 향약 운용은 지역공동체의 결속과 양반 지배체제의 안정적 운영 측면에서 중요한 사회적 제도라 할 수 있다.

셋째 도서관의 기능이다. 향교는 관학기관으로 각종 교과용 도서나 사전류, 주요 저술이나 각 시기의 대표적인 출판물을 소장하고 있었다. 서원의 경우에는 제향 인물이나 학맥을 잇는 문집류, 자료나 사적(史籍)[역사 사실을 기록한 책], 운영에 필요한 고문서 등을 보관하였다.

넷째 각 시기의 종합문화처로의 역할이다. 향교와 서원 중심으로 생활한 사람들의 문화, 저술 활동, 다양한 제례, 경제 활동, 생활문화 등이 총체적으로 구현된 장소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형성된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아 지역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배출됨으로써 유학의 맥을 잇게 된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충절 인물로는 김종서, 성삼문, 박팽년, 김처선, 한충, 남이웅 등이 있다. 충청 유학을 한 단계 발전시킨 인물로는 이유태, 이상, 임헌회, 오강표, 임성주, 성기운, 홍일섭 등을 들 수 있다.

양반 마을의 역사와 흔적이 있는 강화최씨봉산리, 부안임씨양화리, 남양홍씨신대리, 진주류씨하봉리 등은 지역의 반촌문화를 잘 보여 준다.

유학을 바탕으로 충의가 강조되어 무인가문도 다수 배출되었다. 문무를 겸비한 역사가이자 육진개척의 장군으로 충의 대명사인 절재 김종서, 정유재란의 공신 진주류씨 류형 장군, 이괄의 난의 공신 남이웅 장군, 임진왜란의 의병장 변응정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전 시대인 고려시대에도 김흔 장군, 임난수 장군, 김휴 장군 등과 같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세종 지역의 다양한 유교문화는 연기향교전의향교, 서원을 비롯한 개별 성씨의 문중서당 중심으로 계승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유교 문화 유산의 전승]

세종 지역의 유교문화 자산은 국가지정문화재 2건, 시지정문화재 68건으로 문화재 총량에서 대략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다만 전체 지정문화재 가운데 충·효·열의 정려인 향토문화유산이 8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이 외에도 지정문화재는 아니지만 고서와 고문서 등 유교 관련 자료가 다수 남아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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