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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354
한자 金沙驛
영어공식명칭 Geumsa Stat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근대/개항기
집필자 안경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폐지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 금사역 폐지
개정 시기/일시 1460년(세조 6) - 역제가 개편되면서 율봉도 소관에서 성환도 소관으로 옮기고 증약도찰방이 관할하도록 함
성격 역제

[정의]

조선시대 세종 지역에 있던 역.

[개설]

금사역(金沙驛)은 옛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갈운리에 있던 역으로, 성환역(成歡驛)의 작은 소역이었다. 금사역이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갈운리는 2012년 7월 아름동, 도담동과 함께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산울리, 해밀리에 편입·분리되었다.

금사역은 갈운2리의 양지마을과 국도 제1호가 접해 있는 갈운리 검새울 마을 공동묘지 아래 인삼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여지도서』의 연기현 방리조에는 남면에 ‘금사리(金沙里)’라는 마을 기록이 남아 있어 금사역이 있은 곳으로 추정된다.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종촌리[현 세종특별자치시 종촌동]에서 조치원읍 방향으로 국도 제1호를 따라 2㎞를 가다 보면 도로 오른쪽에 갈운리로 들어가는 길이 보이는데 이 길과 맞닿은 곳에 금사역 추정지가 있었다.

여러 지리지나 읍지 등의 기록에 따르면 금사역은 ‘현의 남쪽 5리나 7리’에 있은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기능이 쇠퇴하고 사라지기 전까지 자리를 크게 이동하거나 변화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역(驛)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공문의 전달과 사신 및 관리의 여행에 마필(馬匹)을 제공하고 변방의 군정을 보고하던 곳으로,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원(院)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역원(驛院)이라 통칭되었다.

역원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1895년(고종 32) 근대적인 전화·전보통신 시설이 설치되기 전까지 군사통신수단으로 기능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대개 30리(里)마다 1개 역을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역장 2~3명, 역정호 7~75명을 배치하였다. 고려 초기 6과체제에서는 제도순관(諸道巡官)을 두었다. 뒤에 시행된 22역도체제에서는 공역서(供驛署)의 관할 아래 관역사(館驛使)가 역을 운영하였다. 고려 말에는 역승(驛丞)의 지휘·감독 아래 역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몽골 침입 등 여러 상황에 따라 폐단이 나타났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대대적인 재정비를 이루게 된다. 조선은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면서도 4군 6진 등 북방역로 신설과 역의 합병, 역의 원근(遠近)에 따른 역도 재편, 합배(合排)[조선 전기에 함길도나 평안도의 군사적 요지에 특별히 마련한 우역촌] 설치 등을 통하여 독자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성종대 『경국대전』 반포를 계기로 명실상부한 전국적인 역참 조직, 즉 41역도 500여 개의 역로망이 구성되었다.

[관련 기록]

각종 지리지와 읍지 기록을 살펴보면 금사역은 ‘현의 남쪽 5리나 7리’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1481~1530) ‘현 남쪽 5리이다.’, 『여지도서』(1757~1765) ‘관아의 남쪽 7리에 있다. 성환도 소속이다.’, 『충청도읍지』(1725~1848) ‘현 남 7리 성환도 소속’, 『호서읍지』(1871) ‘남쪽 7리’, 『직산현지』(1871) ‘본역에서 130리’, 『연기지』(1934) ‘현 남쪽 5리이다.’

[내용]

금사역은 조선 전기 청주의 율봉역(栗峰驛)을 중심으로 한 율봉도(栗峰道)의 관할 역 중 하나였다. 1460년(세조 6) 병조에서 전국의 역제를 개편하고 정비하면서 율봉도 소관인 금사역성환도로 옮기고 증약도찰방(增若道察訪)이 관할하도록 하였다.

성환도금사역연기현에 속한 역으로, 본역인 성환역으로부터 약 130리 떨어진 곳이 있은 것으로 보인다. 1871년(고종 8)에 편찬된 『직산현지』는 금사역에 감관(感官) 1명, 수리(首吏) 1명, 행병(行兵) 2명, 마호(馬戶) 10명, 마부(馬夫) 10명, 서자(書者) 6명, 역장(驛長) 1명이 소속되어 있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평민 입마자들에게 지급되던 토지인 마위전답(馬位田畓)은 15결 35부인데, 4결은 해마다 묵은 것이었으므로 실제 11결 35부를 가지고 있었고, 환상미는 5석 1두 8승 7흡 5작[갑자년(1864)]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각 역에 소속되어 있던 역장이나 역노비들이 있었으며, 쓰임새에 따른 여러 말을 소유하고 있었다.

[변천]

금사역은 조선 초 세종조에는 율봉도 역승의 관할역이었으나 1460년(세조 6)에 역제가 개편되면서 율봉도 소관에서 성환도 소관으로 옮기고 증약도찰방이 관할하도록 하였다.

이는 1455년(세조 원년)에 역승도가 찰방도로 바뀌면서 나타난 불합리한 부분, 즉 찰방이 관할하는 역이 지나치게 많고 역로가 광활하여 제대로 역을 관리할 수 없는 점에 대한 보완책으로 역로 조정과 이에 따른 찰방의 명칭을 정한 결과이다. 경국대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이후 금사역성환도의 소속 역으로 남게 되었다.

각종 지리지에서 금사역은 현의 남쪽 5리나 7리에 있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금사역은 역의 규모나 운영에서 크게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의의와 평가]

금사역은 고려시대, 조선시대 교통·통신제도의 체계와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하지만 현재는 ‘역말’, ‘역촌’ 등의 지역 명칭이나 기록들을 통하여 규모와 기능 등을 추측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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